한-칠레 FTA타결 농민들 탈기

입력 2002-10-28 14:23:00

지난 93년 우르과이 라운드(UR) 협정타결과 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으로 더욱 높아진 개방농정의 파고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타결로 또다시 요동치며 농민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공산품의 수출확대로 결국 FTA 타결은 국가적으로 득이 될 것이란 장밋빛 청사진과 달리 농업강국(强國) 칠레에게 농산물 빗장을 열어 제쳐 분노한 농민들은 거리로 뛰쳐 나오고 농촌들녘에는 위기의 한숨소리만 높아가고 있다.

특히 이번 농산물 개방에 따라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을 것으로 전망되는 경북지역 과수농민들은 농사를 그만두고 고향을 떠나야 할 지 심각한 고민에 빠지는 등 갈피를 잡지 못하고 벌써부터 논밭을 갈아엎을 생각에 막막하기만 하다.

◇현장=김천서 4천600평의 포도농사를 짓는 한국포도협회 이동희(60·김천시 다수동) 부회장은 "앞으로 질좋고 값싼 칠레포도가 마구 수입되면 경쟁력 약한 국내 포도 농가들은 절로 망하게 돼 있다"고 걱정했다.

이씨의 걱정은 전국의 10%, 경북의 23%를 차지하는 김천 5천500여 포도농가의 공통적인 현상. 김천 농업경영인회 전경재(44)회장은 "칠레포도 수입은농민들에게 포도농사를 포기하라는 말과도 같다"고 말했다. 2천661ha의 포도밭에서 연간 4만7천300여t을 생산하고 매년 포도 아가씨를 선발하는 등 그동안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이제는 한숨소리만 가득하다.

재배면적 2천730ha에 연간 생산량 6만~7만t, 재배농가 6천400여농가(영천전체 1만4천500농가의 44%), 연간소득 800억~900억원으로 김천과 함께 경북포도의 두 기둥인 영천지역 포도농들의 시름도 커지고 있다.

회원 27명이 10만여평 포도농사를 짓는 금호 선진포도작목반 최영기(49)반장은 "칠레포도 수입사실이 알려지면서 내년에도 포도농사를 계속 지어야 할지 고민하는 농민들이 주위에 많은데 포도농사를 포기할 수도 없어 걱정뿐"이라 답답해 했다.

칠곡군 왜관읍 아곡리에서 20여년째 포도농사를 짓는 배점환(76)씨는 "요즘 막바지 포도수확을 하지만 자유무역협정 소식에 도무지 신명이 나질 않고 이제는 포도 농사도 끝난 것 같다"며 한숨지었다. 칠곡 왜관농협 송수익 조합장은 "대구·서울에 이어 올해는 어렵게 부산지역 농협을 대상으로 거봉포도 판로개척에 성공했는데 소득 감소가 예상된다"고 걱정했다.

◇문제점=이번 FTA로 가장 타격받는 포도농들 못잖게 다른 농민들의 사정도 비슷하다. 사과농사를 짓는 이재권(41·영주 단산면 옥대4리)씨는 "사과와 배가 이번에 제외됐지만 칠레포도가 수입되면 포도대신 다른 작목으로 전환, 또다시 과잉생산과 가격폭락의 악순환으로 농촌은 피폐해질 것이 불보듯 뻔하다"고 우려했다.

전국최대 복숭아 생산지인 청도는 간접피해를 경계했다. 청도군 농업기술센터 채장희 소장은 "칠레 복숭아는 국내산보다 품질이 떨어져 큰 피해가 없겠지만 고급가공품으로 만들어 수출하면 피해가 우려돼 대책마련이 필요하다"고 사전준비를 강조했다.

축산업은 심리적 불안감이 더하다. 봉화한우 고급육을 협업생산하는 청하축산 박노욱씨는 "쇠고기와 닭고기는 각각 400t과 2천t의 관세할당방식(TRQ)으로 준뒤 세계무역기구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이후 논의하지만 축산기반이 붕괴되는 상황에서 축산업의 몰락을 더욱 부채질 할 것"이라 말했다.

한우 집산지인 경주지역 농민들과 함께 사과·배·포도 등 특산물 생산농가들은 호주산 생우수입 등 악재로 걱정이 더 크다면서 농업경영인회 안강읍 협의회김성천(42)회장과 토함산 버섯한우회 최삼호(43)회장은 "큰 일"이라 했다.

울릉약소 작목회 이상학(60) 회장 등 울릉지역 20여 한우농들은 "10년 안에 무관세화한다는 쇠고기도 일정 물량을 매년 저관세로 수입하면 과실류와 함께 소규모축산업까지 몰락하지 않겠느냐는 심리적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대책=군위 의흥면에서 3천여평의 시설포도 하우스 농사를 짓는 백경천(42·군위군 의흥면)씨는 최근 5∼6년생 포도나무 700여평을 캐내고 그곳에 딸기를 심었다.지난 3년간 한·칠레 협상과정을 지켜본 백씨는 무기농법으로 지난해 4월 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껍질까지 먹는 '무농약 품질인증'을 받고 연간 20여t을 생산, 고소득을 올렸지만 더이상 포도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

백씨는 "칠레포도가 대량 상륙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뭔가 대비해야 하지 않겠는냐"면서 "생산비 절감을 위해 하우스 실내 온도를 낮추고 수확기를 종전보다 늦춰 연료비 2천만원을 반으로 낮출 계획"이라 밝혔다.

윤광서 영천시 과수원예과장은 "협상타결로 당장 포도·복숭아 수입량이 급증하는 것은 아니다" 며 "수입이 확대될 2~3년후를 대비해 포도·복숭아의 친환경농법재배 등 품질향상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고 했다.

◇대안=4천평의 포도농사를 짓는 김천 덕천포도원 김성순(74·봉산면 덕천리) 대표는 무농약에 신재배법으로 수학한 포도 대부분을 포도주스와 포도주로 가공, 칠레공포를 벗어나고 있다.

14년간 한국포도회장을 역임하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김 대표는 알이 굵고 신맛이 없으며 당도도 높은 칠레포도는 육질이 단단하고 저장성이 강해 국내포도의 품종개량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칠레포도와 모든 조건이 비슷한 거봉포도의 재배를 확대하는 방안이 조속히 강구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위의 포도농 백경천씨는 "국내 소비자들의 입맛이 고급화돼 우수한 품질만 생산, 품질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했다. 영천시 윤광서 과수원예과장도 "수입에 대비, 포도와 복숭아의 친환경농법 재배 등으로 품질향상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농민들의 자구책과 함께 FTA로 효과를 보는 비농업 분야의 고통분담도 이뤄져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한국포도협회 이동희 부회장은 "영농의욕을 상실한 피해농민들에 대한 보상책으로 전 수출품목에 농특세를 부과, 농가에 지원하는 방안강구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산 시설포도 영농조합 김진수 대표는 "이번 협상으로 수출확대에 따른 공산품 분야의 수익을 농민들에게 되돌려 주는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군위군 오정한(57) 산업과장은 "이번 협상으로 공산품 수출로 얻는 4억달러 무역흑자를 상대적 피해를 입는 농민들에게 농자재·농업경영비 등을 지원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라 말했다. 한편 한국포도회는 26일 오전 대전 유성에서 전국의 이사들과 부회장 등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대책 회의를 가졌다.

사회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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