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어느 광역시에 학술회의차 내려 갔다가 시청을 방문하게 되었다. 정문 앞에 암수 한 쌍의 해태상(像)이 서 있는데, 서울 광화문의 해태석상(石像)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시멘트로 비슷하게 만들어 흰 페인트로 칠한 조악한 작품이라 보기가 민망스러웠다.
이곳만이 아니라 전국 여기 저기에 해태상이 서 있는데, 천편일률적으로 광화문에 선 해태석상을 모방한 작품(?)이라 얼마나 생각없이 안이하게 제작했는지를 가히 짐작케 한다. 광화문에서 조금만 걸어 경복궁에 들어가면 전혀 다른 모양의 해태석상을 볼 수 있다.
광화문 해태석상은 대원군이 1861년에 석수 이세욱(李世旭)에게 명하여 세운 것이라는 기록만 있는데, 당시 경복궁에 불이 나서인지 화기(火氣)를 잡아먹는 물짐승처럼 변형되었다. 그 모습은 사자모양에 가까운 중국의 해태 혹은 기린(麒麟)상과도 다르고 개모양에 가까운 일본의 고마이누(高麗犬)와도 다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변용(變容)된 점은 해태가 원래 뿔을 하나 가진 일각수(一角獸)인데 그 뿔이 없는 모습으로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고마이누는 수놈 머리에 송곳같이 뾰족한 뿔이 나 있다. 왜 뿔이 중요한가? 옛날 법(法)이란 글자의 고자(古字)에는 갈거(去) 위에 해태치가 들어 있었다.
중국에서 고대 신판(神判)을 할 때 해태를 재판석상에 데려오면 해태는 반드시 죄를 지은 자에게 다가가서 외뿔로 떠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태의 외뿔은 법과 정의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중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법과 관련된 곳은 어디나 해태의 모습이 표시되었다.
이 동양적 정의의 상징은 일찍 고대 그리스에도 전파되어 일각수 즉 유니콘(Unicorn)이란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영국 국기에서 보듯 사자보다도 더 힘센 영물(靈物)로 상상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해태, 기린, 고마이누, 유니콘은 각각 그 문명권에 따라 조금씩 모습이 달리 바뀌었지만, 원래 의미는 인간이 바른 것, 좋은 것, 정의를 동경하면서 그것을 조형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의란 좁은 의미의 법적 정의만이 아니라 일반화할수록 사악(邪惡)을 물리치고 길상(吉祥)을 지키는 것으로 '종교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광화문에 선 해태상은 한국적 지리풍수신앙과 습합한 변용이라고 생각된다.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 돌계단에 새겨진 해태상이 외뿔을 뚜렷이 갖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본래의 뜻을 알 수 있다.
이런 진의(眞意)를 모르고 광화문의 해태석상과 그것을 모방한 해태제과의 상표에 기초하여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도, 경찰청 본부에도, 나아가 시도(市都) 경계석(境界石) 심지어 결혼예식장, 어린이 놀이터에까지 모두 천편일률적인 모양의 해태상들을 함부로 세우고 있다.
다행히 근년에 차츰 본래의 의미가 알려지면서 잃어버린 뿔을 복원시킨 해태상들이 등장하고 있다. 1995년에 대법원을 이전하여 정원에 뿔있는 해태상의 추상작품이 섰고, 뒤이어 대검찰청, 서울법대, 사법연수원에 외뿔을 가진 해태상들이 서고 있다.
적어도 법과 관련된 곳에는 이제 뿔있는 해태상이 복원되고 있는 것이다.이미 남립(濫立)되어 있는 해태상들을 한꺼번에 바꿀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바른 법, 바른 정치를 염원하는 의미로 세우는 공공기관 앞의 해태상만이라도 본래의 뜻을 살려 제대로 고증되고 질적 수준이 있는 작품을 해 세워야 할 것이다.
물론 뿔있는 해태상이 서는 만큼 우리나라도 더욱 정의로운 법치주의와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나라로 발전되어가야 할 것이다. 서양에는 가는 곳마다 정의의 상징물로 유스티치아(Justitia) 여신상이 서 있다. 동양적 정의의 상징 해태의 의미가 되살아나 바른 조형물들이 세워져 세계화시대에 걸맞은 한국문화를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서울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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