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눈뜬 장님

입력 2002-10-12 14:20:00

주말 오후다. 퇴근하여 아파트 뒷산의 굴참나무 숲을 바라본다. 번잡스러웠던 한 주일의 뒤끝이어선지, 한 해의 분주한 생명 활동이 결실과 휴지에 이르는 가을이어선지 굴참나무들의 몸짓이 수상쩍다.

평소와는 다른 빛깔과 소리로 무언가를 건네려 하는데 그 알음알이를 도무지 알아차릴 수 없다. 이럴 때마다 나는 두 눈 벌겋게 뜬 장님이나 귀만 유난스럽게 큰 귀머거리에 진배없다.어느 책에서 보았다. 그 책의 저자가 젊었을 때 두부공장을 하는 집에 하숙을 했는데 그 주인은 늙었지만 두부 맛은 일품으로 인근에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단골 식당에서 마침 두부가 떨어져 다른 집에서 구한 두부로 음식을 만들어 내었는데 손님들이 "이건 그 영감님 두부가 아니잖아요" 했다고 한다.

식당 주인의 말을 들은 영감님이 "고마운 손님이군" 하며 기뻐하던 모습을 지켜보던 그 저자가 "영감님께서 연로하시니 이제 두부 만드는 비법을 누군가에게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더니 "비법은 무슨, 그냥 와서 훔쳐가면 되는 거지요"라며 골방에서 몰래 만들지도 않는 그 비결을 아무도 훔쳐가지 않는다고 영감님은 한탄하더라는 거?

눼? 비법은 가르칠 수도, 전할 수도 없는 것이므로 열심을 다해 훔치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어떻게 훔칠까.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연인의 표정을 잘도 훔친다. 그리고는 미세한 변화를 읽어내고는 그것에 열렬히 감응한다.

사랑은 어떤 경우든 연인을 자기 앞에 선 최초의 사람으로 만드는 지극함이 있기 때문이다. 풀이나 짐승이나 벌레 같은 미미한 것들도 모두 지극한 경지가 있고, 조물주의 현묘함을 엿볼 수 있다고 옛사람들은 말했다.

문제는 마음이다. 동심과 같은 초심이다. 지금 이 순간, 훔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책에서 베낀 지식 나부랭이들이 나를 더 답답한 상태로 몰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저 굴참나무는 한해살이의 비법을 자연스레 우리 앞에 풀어놓고 있다. 이 가을,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저 자연에서 훔칠 것인가.

김영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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