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희칼럼-향가 '헌화가'의 시비

입력 2002-09-30 00:00:00

역사상 유명했던 뛰어난 미인을 들어보라고 한다면 아마 클레오파트라나 양귀비의 이름을 들먹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도 이들 미인에 못지않게 뛰어난 미인이 많이 있었다.

신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수로부인(水路夫人).도화녀(桃花女).선화공주.벽화 등의 미인이 있었고 그중에도 수로부인은 "자태가 아름다워 깊은 산이나 큰 연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번 신물(神物)에 끌려갔다"할 정도로 절색이었다어느 화창한 봄날 수로부인의 남편 순정공은 강릉태수로 부임하기 위하여 부인과 수행원을 거느리고 서라벌에서 강릉을 향해 가던 도중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푸른 바닷가에는 천길이나 뛸듯 높은 절벽이 솟아있는데 그 위에는 붉은 철쭉꽃이 만발해 있었다. 수로부인은 그 꽃을 가지고 싶어 수행원에게 그 꽃을 꺾어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그 절벽은 너무도 높아 위험하기 때문에 아무도 선뜻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마침 암소를 몰고 가던 한 노인이 수로부인의 말을 듣고 절벽에 올라가 철쭉꽃을 꺾어 바치면서 노래를 불렀다. "자줏빛 바위가에 잡은 암소를 놓이시고…". 이것이 소위 향가 '헌화가(獻花歌)'이다. 이 '헌화가'는 수로부인의 설화와 함께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었고 따라서 많은 국문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근년에 이르러 전국의 여러곳에 시비나 노래비가 많이 세워지고 있다. 유명한 시인의 대표적인 시, 또 유명한 가수가 불렀던 대표적인 노래, 그리고 그 지방에 오랫동안 전해내려오는 민요 등을 새긴 비가 그 연고지에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비나 노래비에 새겨진 시가나 노래는 대부분 20세기에 들어와서 창작되었거나 불리워졌던 것이 대부분이고 드물게는 조선시대의 시조나 가사 또는 한시가 소재로 되어 있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 중에 가장 오래된 시가는 전라북도 정읍시에 있는 시비에 새겨진 백제의 민요로 알려진 '정읍사'일 것이다.

그런데 왜 향가의 시비는 세워지지 않을까? 그 중에도 특히 유명한 '헌화가'의 시비는 세울만한 여건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일반적으로 문학비나 노래비가 세워진 것은 그 작가나 노래를 부른 주인공이 누구라는 것이 분명히 나타나 있고 또 그 연고지가 분명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헌화가'의 경우는 그 작가가 암소를 몰고가던 노인이란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고 또 그 노인이 이 향가를 읊었다는 장소도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러한 점이 '헌화가'의 시비가 세워지지 못한 이유일는지 모를 일이다.

혹은 이 '헌화가'는 너무 오래전인 신라시대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관련인사들의 유족은 물론 없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이해관계를 느끼는 사람이나 동호인들의 모임이 결성될 계기를 가지지 못해 이 일을 추진할 주체가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외국 선진국의 경우 흔히 유명한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거나 혹은 유명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장소에는 그 역사적인 사실이나 전설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만들어 많은 관광객의 관람에 제공하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경우에 따라서는 별 것 아닌 것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여 어떤 조형물을 만들어 놓고 거꾸로 설화나 전설을 만들어가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동해안은 너무도 아름답다. 동해안에는 수로부인이 철쭉꽃을 꺾어달라고 졸랐을 것 같은 장소가 있을 법도 하다. 푸른 바닷가에 하얀 백사장이 있고 그 뒤로 가파른 절벽이 솟아 있는 곳…, 그리고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그 절벽에는 수령이 천년을 넘을 듯한 고목이 드리워지고 그 사이사이로 철쭉이 떨기로 자라고 있는 곳…, 그런 곳이 발견되지 않으면 그러한 상황과 가장 비슷한 장소를 선정하여 인공을 가하여 보완하면 될 것이다.

장소가 선정되면 그 절벽 밑에 '헌화가'의 시비를 세우는 것이다. 그 옆에 철쭉꽃을 꺾어달라고 조르는 수로부인의 조각상을 세우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리고는 저 유명한 '헌화가'의 발상지가 바로 여기라고 우기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법에 저촉될까?

세월이 흘러가면 언젠가는 그곳이 '헌화가'의 발상지로 자리잡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동해안을 오가는 수많은 관광버스와 승용차가 줄줄이 그곳에서 멈출 것이다.관심이 있는 기관이나 단체에서 한번 시도해 볼만한 일이 아닐까?

(전 대구시장.영광학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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