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 달서구 이곡동 도심 농촌마을에 이웃해 살고 있던 우철원(당시 13세)·조호연(12)·김영규(11)·박찬인(10)·김종식(9)군 등 성서초교생 5명.
91년 3월26일 오전 9시쯤 '꼬마'들은 아침식사후 도롱뇽알을 찾으러 간다며 집을 나섰다.
현재는 성서택지지구로 개발돼 아파트가 밀집한 지역이지만 이 곳은 당시만 해도 산과 들뿐인 전형적인 농촌마을. 아이들은 산을 벗삼아 자주 올라갔다고 그들을 기억하는 친구들은 전한다.
이들은 마을 주변에서 장난을 치며 놀다가 낮 12시쯤 제법 추운 날씨지만 와룡산으로 올라갔다. (성서초교 한 학생이 이 시간 와룡산 입구에서 이들을 봤다고 경찰조사에서 진술했다)
이들은 이 날 오후 2시쯤 주거지 동북쪽 불미골 저수지 인근에 도착, 열심히 도롱뇽알을 찾고 있었다. (인근 한 주민이 이 곳에서 아이들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불미골은 아이들의 주거지로부터 동북쪽으로 약 1km쯤(직선거리) 떨어진 곳이다)
도롱뇽 알 채집에 열중한 아이들은 시간가는 줄도 모른 채 와룡산 이곳저곳을 다녔다.
이 시간 부모들은 걱정에 휩싸였고 해가 완전히 져도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자 이 날 오후 6시부터 아이들을 찾으러 나섰다.
당시 기상대 자료에 따르면 땅거미가 내려앉은 오후 6시20분쯤부터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 기온은 3~4℃까지 내려앉았고 깊은 산중이어서 체감온도는 영하에 가까웠다.
와룡산은 시간이 갈수록 칡흙같은 어둠과 비, 그리고 영하에 가까운 추위가 뒤덮였다.
시간이 갈수록 아이들을 찾지 못한 부모들은 속이 타들어갔고 급기야 이 날 오후 7시50분쯤 경찰에 신고, 본격적인 경찰수색이 시작됐다. 자정과 새벽을 지나 아침이 밝았지만 아이들을 찾지 못했고, 다음 날인 27일 오후까지 수색을 했지만 허탕이었다.
이후 달을 넘기기까지 2천명이 넘는 경찰력이 동원돼 수십회에 걸쳐 수색작업이 이뤄졌다. 3차례의 헬기수색에다 잠수부를 동원, 저수지까지 뒤졌지만 아이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건초기 대대적인 수색작업이 이뤄졌지만 시간이 갈수록 수색작업 횟수나 동원인력은 점차 줄었고 사건발생 수년이 지난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여론의 관심에서마저 멀어졌다.
이렇게 11년 6개월이 흘렀고 마침내 26일 오전 11시30분쯤 집에서 불과 4km남짓 떨어진 와룡산 자락에서 5명의 어린이들은 앙상한 유골로 발견됐다. 장성했으면 20대 청년으로 자라났을 아이들. 꽃처럼 아름다웠던 아이들의 외출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최경철기자 ko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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