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하향주 기능전수자 박환희씨

입력 2002-09-09 14:13:00

대구 달성군 유가면 음리는 대구시 무형문화재 제11호 하향주(荷香酒)의 본향이다. 멀리 경남지방까지 누룩이 나갈 정도로 유명했고, 아직도 누룩 만드는 집이 여럿 있을 만큼 오래전부터 술 빚는 마을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4대째 전통민속주의 맥을 잇고 있는 하향주 기능전수자 박환희(朴丸熙.52)씨. 그의 집안은 300여년 음리에 세거하며 선대부터 술을 빚으면서 하향주와 인연을 맺게 됐다.

열여덟에 박씨 집안에 시집와 하향주의 맥을 이어온 어머니 김필순(85.기능보유자)씨의 뒤를 이어 하향주의 맛을 간직하기 위해 10년 가까이 땀을 흘리고 있는 그는 이제 하향주와 더불어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찹쌀.들국화 등 재료

하향주는 찹쌀과 들국화, 인동초, 약쑥을 넣어 빚어내는 도수 17도의 곡주.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연꽃 향기나는 술'이라지만 아무래도 연꽃과는 인연이 없는 듯해서 궁금해 물었더니 박씨는 하향주의 유래에 대해 두가지 설을 들려주었다.

신라 흥덕왕때 도성(道成)국사가 수도한 비슬산 중턱의 도성암이 병난으로 불타 중수할 때 토주로 빚기 시작하다 민가에 전승된 것이라는 설과 조선조 광해군때 비슬산에 주둔한 군사들이 유가사에서 빚은 하향주를 즐겨 마셨는데 이를 조정에 진상하자 광해군이 천하명주라고 칭찬하면서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는 설이다.

아무러면 어떠랴. 달성 유가사 아랫마을 음리의 밀양 박씨 문중에 전해진 제조법이 대를 이어 여인네들의 손을 거치면서 맥이 끊기지 않고 달성의 대표적인 술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미 세상을 뜬 박씨의 할머니(권분란)는 누룩과 술 빚는 솜씨가 뛰어나 근동에서 '누룩할마시'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주로 손님 접대용이나 제주용으로 빚어오다 1980년부터 공식적으로 술을 빚기 시작했다.

하향주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1983년 문화재관리국의 전국 전통민속주 실태조사에서다. 당시 하향주를 빚고 있는 집은 박씨의 집이 유일했다. 각고의 노력끝에 대구시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은 것은 1996년. 이때부터 하향주의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누룩 숙성기간 100일

박씨의 고향인 유가면은 찹쌀로 유명한 곳이다. 거기에다 비슬산의 맑은 물이 더해지면서 맛있는 술 빚기에는 안성맞춤. 동네가 볕이 많이 들지 않는 음지에 자리잡은 것도 술 빚기에 좋은 환경이 되었다.

박씨는 어릴적부터 할머니와 어머니가 하향주 빚는 것을 지켜보며 자랐지만 별 관심이 없었다. 직장 때문에 열사(熱砂)의 이역 땅으로 떠돌다 부모의 곁을 떠나 미국 이민길에 오른 것이 1980년대초.

뉴욕에서 제법 큰 규모의 청과상을 경영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던 그에게 하향주는 까마득히 잊혀진 존재였다. 그러던 그에게 하향주가 다시 다가온 것은 1993년. 혼자 고향집에 다니러 왔다가 하향주 때문에 눌러 앉았다.

어머니와 주변 사람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전통민속주의 맥을 잇고 세간에 널리 알리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 것. 아이들을 미국에 남겨둔 채 혼자 고향집에 머물며 제조법을 하나둘씩 배우기 시작했다.

누룩 띄우기에서부터 밑술 담그기, 덧술 담그기, 떠내기까지 여러 과정을 익히고, 전통민속주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조언도 구하며 술 빚는 일에만 매달리기를 몇 년, 조금씩 그의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누룩으로 밑술을 담근 후 평균 숙성기간이 100일 걸린다고 해서 백일주로 통하는 하향주는 제조과정이 복잡하다. 술 맛을 좌우하는 누룩 띄우는 일도 쉽지 않다.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첫 해, 밀 300가마나 들이는 큰 일이었지만 경험이 일천한 탓에 누룩을 잘못 만들어 그 해 술 농사를 망치기도 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여러차례 실험을 통해 다른 집과는 다른 특이한 누룩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전통적인 제조법에만 매달리지 않고 다방면으로 요모조모 실험해보는 자세가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기술 발전도 가져왔다.

100% 찹쌀로 만든 곡주라 숙성과정에서 온도 변화에도 민감한 것이 하향주의 특징. 그동안 술을 빚으면서 운이 많이 따라주었지만 술 빚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아 지금도 늘 조심스럽다고 그는 말했다.

지난해 달구벌축제에도 참가, 홍보에 나서면서 올해 봄 첫 제품을 선보였으나 이번 여름에는 아예 술을 만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기온 변화가 심해 꺼려졌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술을 내고 싶은 장인정신이 엿보인다.

지역 명주로 대중화 '꿈'

술 빚는 일만 까다로운게 아니었다. 제조허가를 받는 것도 절차가 복잡해 그동안 애를 많이 먹었다. 면허만도 모두 4종. 재작년 여름 마지막 면허를 취득하면서 조금씩 시설도 늘려 이제는 어느 정도 물량을 댈 수 있을 만큼 키워 놓았다.

비록 지금은 가양주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영세한 규모이지만 박씨는 큰 꿈을 꾸고 있다.

제조시설을 빨리 현대식으로 탈바꿈시켜 이태 후 봄부터 새로운 하향주를 시중에 번듯하게 소개하는 일과 제대로 된 기술을 미국에서 공부중인 아들에게 전수하는 것이다. 하향주의 대가 끊기지 않도록 기술을 그대로 전승하는 일은 그에게 엄중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정성들여 맛있는 술을 마음껏 빚어내고 싶다고 말하는 박환희씨. 진지한 그의 표정이 연하고 맑은 차 색깔이 도는 하향주와 어느덧 닮아 있다. 053)422-9994.

서종철기자 kyo425@imaeil.com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