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석칼럼-무엇으로 태어나더라도

입력 2002-09-09 00:00:00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였다. 나의 독일인 남자친구와 여자친구의 사랑이 깊어져 둘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둘 다 아는 사이라 나는 그 결혼의 증인을 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아들을 낳았다. 나는 돌잔치를 마지막으로 더이상 그 아이를 보지 못했다. 학위논문 작업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졸업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의 어느 날이었다. 어두운 복도 맞은 편에서 누가 유모차를 끌고 오다가 인사를 했다. 친구 부인이었다. 둘이 반가워 한참 떠들고 있는데, 유모차에 탄 아들이 뭐라고 종알거리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벌써 말을 배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많이 컸구나 하면서 볼을 만지려니까, 아이는 얼굴을 돌리면서 엄마한테 물었다.

"마미, 이건 무엇이야?" 놀랍게도 손으로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엄마도 화들짝 놀라면서,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누구냐고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는 더욱 호기심에 가득 차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제법 또렷하게 반복했다. 결국 엄마는 사실 아이가 소리만 낼 줄 알지 뜻은 잘 모른다고 나에게 미안해했다.

그렇다. 그림책에도 없는 처음 본 노란 피부에 머리의 검은 털, 게다가 앞머리에 하얀 털까지 듬성듬성 나있으니, 이게 원숭이의 일종인지 아니면 사람의 일종인지 궁금했으리라. 그래도 나는 그 자신을 태어나게 한 결혼의 증인인데... 웃음이 나왔다.

뜻을 새겨보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단지 태어날 때 딱 한번 무엇을 낳았느냐고 물을 수 있을 뿐이며, 이는 아들이냐 딸이냐를 묻는 말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가끔 책에서 볼 수도 있지만, 이는 명백히 오류이다.

인간에 대해서는 오직 누구냐고 물을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인간은 무엇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오직 물건에 대해서만 무엇인지, 무슨 용도에 쓰이는 지를 물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인간은 결코 물건도 아니요, 사용 대상은 더 더욱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비록 "무엇"으로 태어날지라도 그 순간부터 "누구"가 되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어떤 예외도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무엇을 낳을 수는 있어도, 누구를 낳을 수는 없다. 여기에도 예외는 없다. 즉 모든 부모는 아들이나 딸을 낳을 수 있을 뿐, 특정의 대통령이나 판사, 의사나 회장을 낳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부모는 착한 사람 누구를 낳을 수도 없고 나쁜 사람 누구를 낳을 수도 없다. 가난뱅이 누구를 낳을 수도 없고, 갑부 누구를 낳을 수는 더더욱 없다.

누가 될 것인지를 미리 알고 무엇을 낳는 부모도 있을 수 없으며, 세상에 태어나고 싶다고 손들고 태어나는 자식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왜 나를 낳았느냐고 묻는 자식만큼 배은망덕한 자도 없고, 맞춤식의 누구를 낳겠다는 부모만큼 어리석은 자도 없다.

이 세상의 창조주는 무엇이라 불리는 모든 물건들 가운데 오직 인간에 대해서만 인격을 갖춘 누가 될 수 있도록 허락했으며, 그것도 오직 각자에게 허락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누가 되느냐 하는 것은 오직 태어나는 각자의 과업으로 주어져 있을 뿐이다.

내 아버지가 누구인가는 아버지의 몫이었듯이, 내 자식이 누가 될 것인가도 내 자식의 몫으로 남겨두자. 그래야 나도 내가 되고 싶은 누군가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욕망의 바다에는 한계도 없고 경계도 없다.

거기서는 어떤 부모라도 일류대학에 들어갈 자식을 낳고 싶을 것이고, 결국에는 대통령이나 재벌을 낳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의 한계를 의식할 때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가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이제 수능의 계절과 함께 선거철도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누구라도 일류대학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인생에서 실패하기보다는, 오히려 일류대학에 가야한다는 욕망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또한 숫자로 본다면 대통령이나 재벌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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