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오래된 약속

입력 2002-08-31 00:00:00

길을 가다가 나는 문득 "사람에 대한.사람에 의한.사람을 위한" 이라는 구절과 맞닥뜨린다. 그것은 마치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강물 위로 누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던진 돌멩이처럼 난데없이 내 잠재의식의 수면 위를 떠올라 물장구를 치고 있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환멸.사람에 의한 기쁨과 슬픔.사람을 위한 용서와 기도"와 같이 옷을 입혀본다. 세상살이가 이 짧은 문장 속에 통째로 들어앉아 있는 느낌이다.

한 생이란 결국 이 짧은 문장 안에서 집 짓고 길 내는 일; 그 마을을 들락거리며 나는 여기 이렇게, 당신은 거기 그렇게 서서 가을을 맞고 있다.

기쁨은 잠시고 슬픔은 길다

그리움이란 코끼리와 같아서 하루종일 무언가로 제 배를 채우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 환멸이란 바퀴벌레가 빠진 음식 같아서 세상만사 식욕을 빼앗아버린다. 코끼리와 바퀴벌레는 그러나 친구사이이다.

십여년전 나는, "새앙쥐 한 마리가/만리장성(萬里長城)을 무너뜨렸네, 세상에!/결과론적 이야기지만 그걸, 그냥 콱/처음부터 으깨어야했는데/그래도 그래도…/인간을 믿으므로 재앙이 덮쳤네('가롯 유대'부분)"로 말미암아 "그대가 어떻게 왔는지 나는 모른다.

아침에 눈을 뜨니 뜨락에 서 있는 목련처럼 눈부신 그대가 보였다. 예고 없는 바람처럼, 명분 없는 침략자처럼 논리도 없이 막무가내로, 눈물같은 단 하나의 이름으로 그대는 왔다. 목련 그늘 아래 한 우주가 조용히 흔들렸다"라고 쓸 수 있었던 것; 그대라는 말속에는 아픈 영혼이 살고, '시와반시' 10년이 살고 타는 목마름으로 문을 연 '시와반시 문예대학' 이 초록 숲으로 살고 있다.

'시와반시' 창간 10주년 기념호 중 두 구절을 인용하겠다.

"…1937년작 줄리앙 뒤비비에가 만든 프랑스 영화, 마리 베리가 주연을 한, 주마등 같은 생의 허망을 주제로 한 '무도회의 수첩', 그것은 흑백영화이다. 강교수 많이 먹어둬요. 틀니하게 되면 먹고 싶어도 마음대로 못먹어요 하시는 선생의 분위기도 흑백이었다.

오늘 선생의 의상이 잿빛이어서가 아니라 선생이 앉아 계신 바로 이 자리가 주마등 같은 생의 허망한 가운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은 60년대 대구시절, 미식가이신 선생이 자주 들렀던, 식탁에 붉은 장미가 꽂혀있는 이탈리아노는 이미 아니었다.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중년의 신사도 가고 없었다".

"…내 손을 꼬옥 쥐어주셨다. 차거웠다. 그것이 마음 편한 듯, 아니 이제 이별이 익숙하신 듯, 머뭇대지 않으셨다. 뒤돌아 손 흔들지 않으셨다. 오늘은 무싯날이어서 집안은 텅 비어 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아무것도 없는 것의 무게로 숨막힐 아파트로 선생은 총총 사라지셨다. 우리 시대의 큰 시인 대여(大餘) 김춘수 선생, 그는 내일 아침 7시면 십문 반 크기의 갈색 랜드로바를 신고 저 문을 나와 산보길에 나설 것이었다. 이승의 둑길에서 저 세상의 천사를 만나고 올 것이었다".

사람을 위한 기도와 용서

기쁨도 슬픔도 사람에 의한 것이다. 사람은 시간 속의 존재이므로 기쁨은 잠시이고 슬픔은 길다. 외로움을 지나 무상함 저편에 사는 슬픔; 그에게는 언제나 건초 타는 냄새가 난다.

한 시인은 차창에 비친 늦가을 풍경을 "서서 말라버린 수수밭이며 오래된 약속 같은 늙은 느티나무며 생뚱히 치마를 말아 쥔 단풍나무 눈빛을 차마 감당할 수 없었다"고 쓰고 있다. 오래된 약속 같은 늙은 느티나무 밑에 밑줄 긋고 오래 머물렀다.

문예대학 개설 10주년을 맞아 올 가을 우리는 '오래된 약속'을 창간하기로 뜻을 모았다. 미리 보는 창간사 끝 부분은 이렇다. "십 년이라는 짧지 않은 날, 오직 문학이라는 이름 하나로 만난 우리는 혹은 지금 여기 함께이기도 하고, 혹은 이름만 남아 있기도 하고, 혹은 유명을 달리한 분들도 더러 있다.

함께 한 길 돌아보면 눈물겹고 함께 할 길 바라보면 마음 설렌다. 불가에 기대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릇 소중한 만남이란 오래된 약속일 터이다. 당신과 나는 약속을 만들고, 만든 약속을 믿고, 다시 약속을 만들며 여기까지 왔다. 우리 만남이 그와 같듯이 '오래된 약속' 또한 사람을 위한 용서, 사람을 위한 기도; 그 오래된 약속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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