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폴 세잔의 삶과 예술

입력 2002-08-17 14:07:00

폴 세잔이 활동하던 당시 누구도 그를 화가로 부르길 주저했다. 비평가들조차도 그의 작품을 진실로 이해하지 못했다.

수없이 화판을 가지고 고뇌했던 액상 프로방스의 그 빛나는 태양과 풍경, 그가 평생을 매달려 그려온 생 빅투와르 산.그는 그 산이야말로 자신이 정복해야할 자연, 그 것으로 생각했다.

65세때인 1904년, 그를 잘 이해하고 20년 동안이나 존경했던 에밀 베르나르와의 편지에서 세잔은 자신의 참된 예술에 대한 이념들을 호소했다.모든 자연은 원과 뿔, 그리고 원기둥으로 이루어 졌다는 예술적 신념과 함께 예술가는 일반 대중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의 예술에대한 믿음과 굳은 정신을 소유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연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탐구에 주목하면서도 자연에 너무 충실하거나 복종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인상파 화가들을 비롯한많은 화가들이 순간의 감각에 빠져 진정 구현해야 할 자연의 질서와 형태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다.고독과 절망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추구했던 이 열정은 피카소를 위시한 입체파 예술을 탄생시켰다.

1839년 액상 프로방스에서 태어난 세잔은 부르봉 중학교 시절부터 에밀 졸라와 친구가 됐고 18세가 돼 데생을 시작했지만 20세에 부친의권유로 법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22세에 파리로 가 아카데미 스위스에서 데생을 익혔다. 파사로와 교류를 갖고 루브르 미술관에 드나들면서 거장들의 작품을 접하게 된다.

들라크루아의 격정과 앵그르의 에로틱한 표현에 매료돼 후에 들라크루아의 메데, 성 안토니오의 유혹 등의 작품으로 나타났다.

에밀졸라는 1886년 클로드라는 한 무능력한 화가를 주제로 한 소설 '작품'을 발표, 파문을 일으켰으며 세잔은 이 소설이 자신을 모델로 했다하여 30년이상의 우정이 깨졌다.

불행하게도 세잔은 평생 꿈꾸었던 살롱전에 단 한번도 입선하지 못하고 운명했지만 치열한 삶속에서예술가의 살아야할 길을 잘 보여주었다.예술가가 어떤 예술관으로 어떻게 살아야하고 그것을 어떻게 창조해 나가야 하는가를.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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