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오후

입력 2002-08-08 14:06:00

검은 당나귀들이 다가오듯어두움이 왔다

갈참나무잎들은 끼리끼리 입맞추며

각자의 잠자리로 찾아들었다

지금 적막한 계곡에서

흐르는 물만이 소리 낮추지 못하는 건

물 밑 모래,

돌들의 안달 때문이다

제 자리에 서지도, 멀리 가지도 못하는

조바심 탓이다

검은 당나귀들이 지나가듯

밤이 깊어지고,

당나귀들이 뿜어내는 지린내처럼

질펀한 밤이

안달하는 것들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김세웅 '야영'

계곡에서 야영을 할 때 밤이 깊어지면 물소리만 계곡 가득히 들린다. 그런데 그 물소리가 물 밑 모래, 돌들의 안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시인의 예민한 감각은 그것을 눈치채고 있다. 특히 제 자리에 서지도, 멀리 가지도 못하는 조바심 탓이다는 구절에 이르면 어느새 안달하는 주체가 모래나 돌이 아닌 인간으로 전환되는 정서의 극적 전환을 맛보게 된다. 이 지점에서 독자들의 자기 성찰의 공간도 생긴다. 이게 바로 시의 힘이다.

김용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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