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화가 강정희씨의 새로운 시도

입력 2002-08-05 14:02:00

그림은 '작가와 세상을 연결시켜주는 통로'라고 했다. 창작의 고통이 작가의 내면세계를 보다 넓고 기름지게 가꿔주는 자양분이라면 그림에 대한 열정은 세상을 향한 작가의 삶을 더욱 치열하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강정희(53)씨. 지난 1년동안 뉴욕생활을 마무리하고 최근 귀국한 화가다. 50대 중년의 작가는 먼 이국 땅에서 낯선 문화와 새로운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라는 화두를 들고 세상을 들여다 보았다.

공간의 변화는 그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이 때문인지 막 둥지로 돌아온 그의 얼굴에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 자기자신과 창작의 본질에 접근하려고 애쓴 시간들의 흔적이 엿보인다.

작년 봄 혼자 미국으로 '훌쩍'

지난해 봄 그는 훌쩍 뉴욕으로 날아갔다. 벽 속에 갇혀 세상 물정 모르고 살아오다 단순히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10여년전 손님처럼 갔다오겠다는 생각으로 파리에 갔던 것처럼.

가족의 양해를 얻어 세상 속으로 자기를 툭 던져놓을 요량으로 뉴욕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말대로 뉴욕은 자기자신을 정확하게 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림은 제쳐두고 그는 자신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9개월 동안 미국문화의 다양한 측면들을 체험했다. 새로운 자연과 문화를 가까이 접하면서 그는 자기 자신을 점검했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지켜본 이런 경험은 '자기발견'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40년간 붓을 잡아온 그가 낯선 땅에서 만난 것은 그림이 아니었다. 그림을 그림이게 하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우선했다. 작업실을 마련해 하루 10시간 이상 식음을 잊어가며 창작에 열중하면서 그는 자신을 화폭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흔히들 중요시하는 테크닉이나 틀 속에 갇힌 잘 짜여진 아름다움과 같은 형식이나 보편에 대한 싫증이 그를 엄습했다. 캔버스 10개를 동시에 펼쳐 놓고 빠른 붓터치로 화폭을 채워가는 작업을 통해 그는 틀을 깨는 연습을 반복했다.

자연과 영감이, 일상의 사물과 현재의 자리가 다 스승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아무런 생각없이 툭 던지듯 그리는 그림이 더 의미가 있음을…. 기존의 자기 틀에서 벗어나 조금씩 달라지는 그림과 자신을 보면서 뉴욕에서 얻은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그는 또 인도(印度)를 꿈꾸었다.

하루 10시간씩 고독한 창작

인도는 그에게 미답, 미지의 세계였다. 뉴욕과는 판이한 원초적인 삶과 죽음의 땅. 평소 불교에 대한 공부도 전혀 없었고, 아무런 사전 정보와 지식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인도를 보기 위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여행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그는 또 다시 자기자신을 보기 위해 발길을 재촉했다. 불교 8대 성지 순례길에 올랐다.

그의 눈에 비친 인도라는 세계는 한마디로 열린 자유였다. 물질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뉴욕이 틀이 있는 자유의 땅이라면 인도는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를 넘어서는 틀이 없는 자유의 세계였다.

비파사나 아슐람 명상센터에서 열흘간 머무는 동안 작가는 자신의 내면에 투영된 오물을 보았고, 묵언의 고행속에서 마음의 평정상태를 체험하기도 했다.

1년간 미국에서의 생활은 정신적으로 고갈되는 느낌과 고독감이 늘 함께 했다고 작가는 말했다. 하지만 인도에서 보낸 한 철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늘 긴장되고 베푸는 삶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준 의미있는 경험의 연속이었다고 고백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시인, 작가, 종교인들이 정신적 안식처로 동경해오던 인도. 작가는 100일 동안 인도에 머물면서 인도라는 세계의 한 단면을 눈으로, 피부로 직접 확인하고 인도를 꿈꿔오던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된 것이다.

인도에선 명상…"나를 봤죠"

늘 혼자 닫힌 공간에서 무언가를 흰 캔버스에 옮겨내는 작업에서 벗어나 대자연과 호흡하며 그 자연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숱한 인도인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들에게서 자기 모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인도사람들의 밑바닥 삶도 체험하고 느껴보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럴수록 자신이 철저하게 부르주아였음을 실감했다.

39도를 오르내리는 살인적인 더위로 체력은 소진되고 있었다. 더욱이 낯선 환경에서 자신의 안위를 지키려할수록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가 그의 몸을 에워쌌다. 자신이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낭패감….

하지만 모든 긴장과 자신에 대한 집착의 끈을 놓았을 때 찾아든 평화는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희열이었다. 습관대로 철저히 자기방어의 벽을 쌓던 그가 어느 순간 자신을 내던져 버렸을 때 찾아온 믿기지 않는 결과를 목격하기도 했다.

고행과 같은 여행길에서 인생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 인도는 바로 자신의 스승임을 비로소 알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하루 13시간씩 명상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결과는 중요치 않다' '천천히 새롭게 시작해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허공에 호작질을 하면서 그는 깨달았다.

그림은 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자신을 위해 그린다는 사실을…. 그동안 늘 무거운 짐이었던 숙제들이 일순간 풀리는 것 같았다고 그는 말했다.

이제까지 자신이 그린 그림의 밑바탕에는 불교적 색채가 깔려 있었음을 알게 된 것도 이번 여행의 소득이었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라'는 '자비경'의 구절을 떠올리며 작가는 어느덧 명상에 빠져 든다.

서종철기자 kyo425@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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