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을 간단하게 말해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이라고 하기도 한다. 유학공부가 수기에 해당되는 수신제가(修身齊家), 치인에 해당하는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두단계로 구분돼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엔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는 자신의 마음과 행실부터 먼저 닦아야 한다는 보다 큰 가르침이 담겨 있다.
선할수도 있고 악할수도 있는 불완전한 인간들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사회서 더불어 살면서 질서있고 조화로운 공동체사회를 만들어 가려면 사회 지도층인 선비들의 마음과 행실이 발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마땅한 의무이기도 하다.
그래서 선비들은 어릴때부터 평생동안 독서와 사색을 통해 상민들이 생업에 열중해 고생하는 만큼 열심히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고자 했다.
옛 사람들의 독서는 청소하기 옷입기 인사하기 등 기초적인 생활규범을 익히는 '소학'(小學)에서 시작해 '대학'(大學)을 읽고 '심경'(心經)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을 거쳐 '주자대전'(朱子大典)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경'(禮經) '역경'(易經) '춘추'(春秋) 등 경전을 순서대로 읽고 익혔다.
퇴계 이황 선생은 이가운데 심경공부를 특히 강조했는데 올바른 마음가짐이 자신의 행실을 바르게 함은 물론 백성을 두루 이롭게 하는 덕치(德治)의 근본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심경'은 주자(朱子)보다 후대 사람인 진덕수가 '시경'(詩經) '서경'(書經) '논어'(論語) '중용'(中庸) 등 각종 고전에서 심성(心性)에 관한 글을 모은 책으로 사람의 마음(心)과 하늘이 사람에 부여한 성(性)과의 상호관계를 논한 것이다. 퇴계는 사람의 심성(心性)이 천리(天理)와 하나가 되는 성인(聖人)의 경지(心卽理 性卽理)에 이르기 위해서는 항상 경(敬)의 자세로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게 잡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그래야만 사물의 이치와 사리를 바르게 보고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옛 선비들의 독서는 오늘날처럼 한번 읽고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읽고 또 읽어 완전히 꿸때까지 읽는 반복적인 독서였다. 그것도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어 읽어 글소리가 몸에 배어들도록 하고자 했다.
그래서 선비들은 지금으로선 상상이 힘들 정도로 한가지 책을 수천번 수만번 읽기도 했다. 김득신은 '고문36수독수기'(古文三十六首讀數記)에서 '주책'(周策) 1만5천번, '중용서'(中庸序)와 '노자전'(老子傳)을 2만번 읽는 등 1만번 이상 읽은 책이 36종이며, '백이전'(伯夷傳)은 1억1만1천번을 읽었다고 기록했다.
황덕길은 '김득신독수후기'(金栢谷得臣讀數後記)에서 윤결은 '맹자'를 1천번, 노수신은 '논어'를 2천번, 최립은 '한서'(漢書)를 5천번, 차운로는 '주역'(周易)을 5천번 읽었다고 썼다.
독서와 사색으로 심(心)과 천리(天理)가 하나가 되고 심신(心身)이 하나가 되는 인고의 수양과정을 통해 선비는 온화한 인품과 도리에 어긋나는 일에는 서리처럼 엄격한 신념을 동시에 갖추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벼슬에 나간 선비들의 치세(治世)는 언행(言行)과 학행(學行)이 일치된 것이어서 어질고 강직하게 나타나 후세에도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선비가 임금이나 대신들을 상대로 목숨에 연연하지 않고 직언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힘겨운 과정에 바탕한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태조 이성계의 재위 2년에 세자빈이 내시와 간통한 사실이 발각되자 사헌부 대간들이 진상규명을 왕에게 요구했다. 이성계는 신하의 무례를 내세워 대간들을 모두 유배시켰으나 대간들은 유배지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효종5년 황해도 관찰사 김홍옥은 잇따른 천재지변에 임금이 신하들의 의견을 묻자 왕실이 금기시 해 오던 적통(適統)의 문제를 상소했다가 체포돼 국문을 당했다. 그러나 김홍옥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상소가 옮음을 강변하다 숨졌다.
중종14년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날 밤에는 사관(史官) 채세영이 대궐로 들어가 영의정 등 대신들에게 사건의 내용이 무엇인지 물었으나 얼버무리기만 했다. 그러자 채세영은 임금에게 조광조 등이 무슨 죄가 있어 이렇게 하십니까. 죄명을 듣고자 합니다고 당당하게 아뢰어 임금의 불의를 따졌다.
이처럼 임금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는가 하면 성심을 다해 간언을 해 잘못을 바로잡으려 해도 받아지지 않을땐 지체 없이 벼슬을 그만 두었다. 연산과 광해군 시대에는 인륜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벼슬에 나가기를 아예 기피하거나 처음부터 초야에 묻혀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산림처사(山林處士)들이 많았다.
물론 옛 선비들 모두가 나아가고 물러날때의 분별(出處之辨)과 의리와 이욕의 분별(義利之辨)을 지켜 백성들의 존경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에도 권세나 탐하고 탐욕적 이어서 손가락질 받는 소인배 속유(俗儒)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오늘의 지도자들보다는 훨씬 덜 지탄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늘의 공직자들은 나아갈 줄만 알았지 도대체 물러날 줄을 모른다. 공직에 나가서 비리를 저지르거나 비리의혹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그 자리에 연연하고 있다.
나아갈때도 자격미달이면서 옛 선비들처럼 사양 한번 하는 법이 없고 나중에 말썽이나 일으킨다. 얼마나 염치가 없길래 장관자리를 놓고 떠나는 사람과 내보내는 측이 보복이니 배은망덕이니 시비를 벌이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옛 선비들이 벼슬살이에 나가든 초야에 있든 자신의 마음을 닦아 언행(言行)과 학행(學行)을 일치시키려한 자세는 전시대의 유물이라고 부정만 할 일이 아니다. 시대가 달라져 옛 선비들이 내세운 도의와 규범이 오늘날 모두 수용될 수는 없다하더라도 그런 자세는 오늘날 더욱 절실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삶살이의 도리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옛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고민해야 할 근본 문제로 여전히 남아있다.
글:최종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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