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잠자는 백수의 콧털을 건드리는가".
여기 '백수'가 있다. 나이 서른에 부모님 호주머니를 뒤져 몰래 돈을 챙기는, 그러나 천성이 착한 천진한 백수다. 뒤통수에 박히는 세상의 따가운 시선보다 스스로가 부끄러운, 그래서 늘 양보하고 사는 그런 백수다.
그런데 이 백수의 머리꼭지를 돌게 한 일이 생겼다. "못먹고 못사는 백수의 딸랑남은 전재산, 300원짜리 라이터를 챙기겠다구?" 자, 이제부터 백수에게 남은 일은 라이터 탈환이요, 그도 안되면 폭사다. "이판사판이다".
17일 개봉한 '라이터를 켜라(감독 장항준)'는 쫀쫀한 백수와 삼류 조폭 보스가 300원짜리 일회용 라이터를 놓고 벌이는 다툼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고 거기에다 '막가는' 그늘의 자식인 백수와 조폭이 등장하는 것만으로 코믹의 기반이 탄탄하게 깔려있다. 그러나 '라이터를 켜라'는 백수를 보는 마냥 호락호락하게 볼 일은 아니다.
깡패를 동원하는 타락한 정치인, 그 정치인에 빌붙어 사는 삼류깡패, 그리고 선량하지만 가장 '천민'인 백수(혹은 서민)가 최소한의 그것마저도 이들에게 유린당했을 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그리고 있다.
영화는 허우대 멀쩡한 날백수 '허봉구'(김승우 분)가 예비군 훈련을 떠나면서 시작한다. 아버지 호주머니를 뒤지다 들켜 혼이 난 봉구는 어머니에게 간신히 2천원을 얻는다.
2천원으로 우동을 사먹고 나니 남은 돈 300원으로 산 일회용 라이터. 차비도 없어 목적지도 아닌 서울역까지 택시를 얻어 타고 온 봉구. '담배나 한대 필까' 그런데 라이터는 이미 삼류조폭 보스 양철곤(차승원 분)에 뺏긴 상태.
"아니, 백수한테 하나 남은 보물을 빼앗아? 지옥까지 쫓아가서 받아낸다" 분을 참지 못한 봉구는 라이터를 되찾기 위해 철곤을 따라 부산행 새마을호에 오른다. 철곤을 보자.
보궐선거에 출마한 검사출신 박용갑 국회의원(박영규 분)의 선거를 도왔으나, 1년이 지나도록 '땡전 한닢' 받지 못했다. 가뜩 열받아 있는 판에 고작 300원짜리 라이터 하나 돌려달라고, 칭얼거리는 봉구는 잘 걸린 뭇매감이다. 알고보면 봉구만큼이나 불쌍한 인간이다.
박 의원이 강경하게 돈을 주지 않고 버티자, 철곤은 열차를 점거하고 열차 안은 아수라장이 된다. 인질로 잡힌 기차 승객들 사이로 성큼성큼 비집고 나오는 봉구."라이터 내놔!" 라이터를 되찾으려다 뜻밖에 열차를 구하는 봉구는 '스피드'의 키아누 리브스가 되면서 사태는 탈선한 열차마냥 겉잡을 수 없이 치닫는다.
'라이터를 켜라'는 낯익은 웃음장치가 요소요소에 등장한다. '열차'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인간군상들의 다툼은 '주유소 습격사건'을 닮았고, 차승원은 '신라의 달밤'의 폭력교사에 어설픈 콧수염을 달았을 뿐이다. 세 작품 모두 시나리오 작가 박정우씨의 연이은 작품이니 그럴 수밖에.
'라이터를 켜라'는 불합리한 억압.제도에 억눌려 살아온 인간이, 보잘 것 없지만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을 되찾기 위해 떨치고 일어선 통쾌한 '역전극'이다.개봉관 아카데미, 중앙시네마, MMC 만경관, 메가박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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