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구순의 차수돈 할아버지

입력 2002-07-08 14:24:00

차수돈(91.경북 구미시 봉곡동)옹은 요즘 젊은이 못지 않게 많은 스케줄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독서와 음악감상, 사군자 그리기, 노인대학 강연, 한달에 한번꼴인 일본 나들이 등 도저히 구순(九旬) 노인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다.

65세 때 취미삼아 시작한 사군자는 그의 큰 소일거리 중 하나. 그는 매주 화.금요일 오후 대구시 수성구 만촌2동 동사무소에 마련된 서예교실에 빠짐없이 출석, 묵향에 젖기도 하고 문화재 강좌를 듣는 등 알찬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함께 글씨를 익히는 60, 70대 노인들은 차옹의 친구들. 비록 나이 차이는 많지만 차옹에게는 그들이 오랜 친구나 다름없다.

1911년 12월 30일생인 차옹의 고향은 경북 하양. 중농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별 부족한 것 없이 지내온 그는 15세때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선친은 일본유학을 반대했다. 국내에서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농사짓는 것이 선친의 뜻이었다.

하지만 차옹은 그 뜻을 거스르고 일본행을 결심했다. 도쿄의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어려움이 많았다. 선친이 반대한 유학인 탓에 집에서 보내온 생활비는 늘 부족했다. 그래서 정원 손질 등 아르바이트로 4년간 학비를 조달하는 등 어렵게 과정을 마쳤다.

중학 졸업후 그는 4년과정의 도쿄 수의전문학교에 진학, 졸업했다. 그의 나이 23세때다. 차옹은 "당시만해도 수의사로서 할 일이 많지 않았어. 그래서 만주로 건너가 이런저런 일을 하다 3년을 보낸 후 귀국했지"라고 지난날을 회고했다. 한때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별 일 없이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그는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교단에 복직해 경산 진량중고에서 실업 및 생물교사로 28년 가까이 근무했다.

퇴직후 10년 가까이 여행사에 근무하기도 한 그는 일본문화에 익숙하고 현지에 친구들도 많아 노인대학의 일본여행 가이드 역할을 맡기도 했다. 요즘은 한달에 한번 꼴로 혼자 일본나들이를 할 정도.

주로 8~9시간 걸리는 배편을 이용하는 여행이지만 젊은 배낭족 못지 않는 열정으로 재미있게 여행을 즐기고 있다. 차옹이 사군자를 처음 접한 것은 한 중국인으로부터다. 재미삼아 붓을 잡은 것이 벌써 30년에 가깝다. 27세때 결혼한 이후 해로해온 아내를 7년전 먼저 떠나보낸 후 요즘은 시간나는 대로 붓을 잡는다.

아침 7시면 어김없이 일어나고 밤 11시면 잠자리에 드는 규칙적인 생활이 차옹의 건강비결. 아침 일찍 그날 일정을 잡고 그대로 지킨다는 차옹은 주로 낮에 일본 친구들이 보내준 '문예춘추' 등 일본 잡지와 서적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모임에 나가 강연하는 등 바쁘게 움직인다.

평소 건강한 체질이라고 소개한 차옹은 요즘도 하루 반갑씩 담배를 태우지만 술은 전혀 하지 않는다. 평생 소식(少食)해왔고, 단 것을 좋아해 늘 사탕을 갖고 다니며 먹을 정도. 한달 용돈은 약 30만원이라고 귀띔했다. 주 활동무대가 대구여서 구미의 아들 집에는 한 주에 이틀정도 머문다는 그는 대구의 지인이 마련해준 거처에서 거의 생활하고 있다.

"또래 친구들은 이미 다 죽고 없어. 그래서 조금 외롭기도 하지만 젊은 친구들이 많아 좋아. 나이 차가 나면 어때. 서로 대화가 되고 어울릴 수 있으면 그만이야…".일본에도 50, 60대 젊은 친구들이 많다고 소개한 차옹은 매달 일본나들이를 가면 그 친구들이 서로 반갑게 맞아주고 서로 자기 집에 묵고 가라고 해서 아주 즐겁다고 말했다.

몇달 전 허리를 다쳐 조금 불편하긴하지만 너무 바빠 아플 시간도 없다며 활짝 웃는 차옹은 그래도 아직 건강에는 별 문제가 없다며 벌떡 일어나 한 발로 균형을 잡아 보인다. 증손까지 본 망백(望百)의 나이지만 한.일 민간교류를 통해 양국의 친선을 도모하는데 힘을 보태고 싶다는 그의 소망이 가슴에 와닿는다.

서종철기자 kyo425@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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