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6년 '아시안 게임' 개막식이 열렸던 날 나는 잠실 운동장의 객석에 있었다. 하필 그날은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참관자들의 질서의식을 걱정했지만 그것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
운동장 입구에서 차례로 비옷을 받기 위해 길게 한 줄로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에는 긍지가 배어 있었다. 특히 비 때문에 젖은 운동장 잔디 위에 유치원 어린이들이 웃으면서 초립동이 춤을 추는 귀여운 모습에는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비슷한 감격을 88년 '올림픽 개임' 개막식에서도 맛보았다. 직접 개막식전에 가지는 못했지만, 운동장 잔디 위에 어린 소년이 굴렁쇠를 천연덕스럽게 굴리던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때 그것은 좀처럼 지울 수 없는 영상으로 간직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감격도 세월 속에 점점 묻혀져갔다. 그것도 우리정치의 부정과 부패의 탁류에 휩싸여 저만치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참 이상한 일은 이번 '월드컵'에서 잊어버린 것으로 치부했던 지난날의 그 감격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운동장을 누비는 우리 선수들의 모습에서 초립동이 춤을 추었던 유치원생들이 겹쳐졌고, '붉은 악마'들의 열띤 함성에는 질서 정연하게 줄 서서 비옷을 받던 시민들의 의연함이 연상되었으며, 그리고 골문을 향해 돌진하는 안정환의 투지에서는 굴렁쇠를 굴렸던 그 소년의 당당함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지난날의 우리 나라 역사책을 읽을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책들을 읽으면서 몇 차례나 내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된다. 역사책에 써 놓은 그대로라면 위대한 임금도 영특한 신하도 참 많았다.
그런데도 왜 백성들은 굶주려야 했고 끝내 나라는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을까? 이웃나라를 섬기는 사대주의에 젖었고 성리학의 교조적 강제는 신정체제를 방불케 했으니 백성들의 원한이 하늘에 닿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 시절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그럴 수 없이 다행스럽다.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필경 하찮은 선비행세로 죄 없는 농민들을 괴롭혔거나 아니면 상놈으로 내몰리어 어느 산야에서 허기진 배를 안고 나둥그러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하루 세끼 밥을 제대로 먹게 되었나? 권위주의 통치의 강압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또 언제부터였나? 그리고 어느 때부터 세계와 겨루면서 당당히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을까? 수 천년간 내려온 빈곤을 해방시킨 것은 산업화였다.
강제와 억압에서 해방은 민주화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지배층만의 독점 문화에서 해방되어 다원적 문화주의로 달려가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니 산업화, 민주화, 다원적 문화주의로 우리 역사의 오랜 숙망이었던 3대 해방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 해방이 이 땅에 자리잡은 것은 불과 반세기도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가 이들 3대 해방을 이루어내었다. 정말이지 "우리가 해냈다".
너무 큰 소리 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계사에서 최하위 국가 群에 속했다가 불과 반세기만에 선진국가 군으로 들어선 우리 나라와 같은 사례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 엄청난 일을 "우리가 해냈다".
정확히 말한다면 지금 기성세대로 몰리고 있는 그 세대의 희생 위에 이 일이 이루어졌다. 그들이 일구어 놓은 그 터전 위에 이른바 386도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러기에 나는 이들 기성세대야말로 '역사 세대'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역사 세대'야말로 우리의 새 역사를 만들었던 장본인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나이키 신발도 신어보지 못했고, 맥도날드도 먹지 못했으며 라이브 콘서트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렇게 살면서 일구어 낸 새 역사였다.
그렇다고 우리를 알아달라고 푸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올바르게 바통 터치를 해달라는 것이다. '역사 세대'가 이룩한 그 터전 위에 가치로운 통일도 통합도 발전도 이룩하라는 것이다. 나아가 닫힌 나라가 아니라 열린 나라를 이루어 세계문명을 주도해 달라는 주문을 할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 세대'의 희생에서 벗어나서는 무임승차로 권력을 잡았던 전업정치인들의 천민성이 다시는 기승을 부릴 수 없게 해야 한다.
그들이 설치는 한 새 시대는 또 다른 암초에 걸리게 될 것이다. '역사 세대'로부터 이어받는 바통 터치의 장엄한 의식을 우리는 '월드 컵'에서 바라볼 수 있고 안정환, 박지성, 김남일, 이천수, 차두리 등이 누비는 그라운드의 그 투지에서 새 시대의 미래를 자신할 수 있게 된다.
안덕규 이화여대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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