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야기-술과 낭만

입력 2002-06-18 14:08:00

오원 장승업은 어떤 풍모였을까. 얼핏 영화 취화선에 나오는 최민식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낭만과 풍류를 즐기는남자다운 외모를 갖고 있지 않았을까. 그건 결코 아니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코가 빨갛고, 얼굴에 털이 많았는데 특히 카이젤 수염처럼 콧수염이 덥수룩 했다고 한다. 코가 빨간 것은 주독(酒毒)때문이고, 수염이 많은 것은 술독을 끼고 살아 외모에 신경쓸 틈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한마디로 볼품이 없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기야 그림 그리는데 외모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장승업 마냥 예전 화가들이 술을 마시면서 벌인 기행은 너무나 많다. 화가다운 '끼'가 넘치는 탓이다. 영남문인화의 개척자 석재 서병오(1862∼1936)선생도 대단한 애주가였는데 낭만적인 일화를 여럿 남겼다.

'어느날 술에 만취한 석재는 술집 뒷마당에서 교교한 달빛을 즐기다 우연히 술독 하나를 발견했다. 술독안을 들여다보니 하늘의 달이그위에 둥둥 떠있었다. 흥분한 그는 바가지로 달을 떠 마시기(?) 시작했다. 술독을 거의 다 비웠는데도 바가지가 닿지않아 바닥에 깔린술에 달이 그대로 떠있었다. 밤새도록 바가지로 술독 안을 긁었지만 끝내 달을 뜰수 없었다고…'.

몇십년전만 해도 화가(특히 문인화가)들은 취흥이 도도해지면 온갖 재미있는 장난을 벌였다. 기생의 흰색 속치마에 난을 치는가 하면 즉석에서 붓장난을 해 손님이나 기생에게 선물을 하기도 했다. 화가들만이 할 수 있는 낭만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도 대단한 애주가였다. 그는 하루 한끼 저녁만 밥을 먹고, 두끼는 밥대신 술을 마시면서 한담을즐긴 풍류남아였다. 애주가였던 김환기는 술을 마시면 백자타령을 했고, 그림도 술 취향과 비슷하게 백자 항아리, 달, 여성을 많이 그렸다.

장욱진도 입에 술을 댔다 하면 바닥을 보고야 마는 성미였고, 술을 과하게 마셔 여러번 병원에 업혀 간 일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순진무구한 그림을 그렸는지 모를 일이다. 소전 손재형은 술은 안 마시고 안주만 축내 눈총받는 스타일이었다. 그의 별명은 효적(肴賊·안주도둑)이었다고.

지난 3월 팔순전을 가진 원로화가 서창환씨도 대단한 애주가로 통한다. 얼마전 필자는 그와 점심을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남구 봉덕동 단골 중국집에 들어선 그는 밥보다 소주 한병을 먼저 시켰다. 젊은 시절부터 어려운 화가들을 집으로 불러 술을 즐겼던 그는 그 연세에도 불구하고 요즘도 매일 소주 1,2병을 마신다고.

신명 때문에 마시는 건지 술이 술을 먹는건지 알 수 없지만, 그때만 해도 낭만의 시대였음에 틀림없다.

박병선기자 l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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