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날조된 치부책

입력 2002-05-28 15:11:00

'왕은 뇌물 수수 내역이 적힌 치부책을 신하들 앞에 내놓는다. 신하들은 기를 쓰고 자신이 해당되는 쪽지를 찢어 불 태운다. 왕은 분명 뇌물 수수를 확인했지만 약점이 있는 신하를 용서함으로써 더욱 더 복종을 받아낸다'. 최근 방영된 TV 역사드라마의 한 장면이지만 치부책마저 권력의 '부패 고리'에 이용됐다는 사실에 실소를 금치 못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수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같은 수법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이다.

▲치부책은 '금품을 출납한 내용을 적은 책'으로 요즘 기업 입장에서 보면 재무제표에 해당한다. 우리 선조들은 치부책을 소중하게 여겼다. 금전이 관계된 것이라 잘못 기재할 경우 엄청난 손실을 감내해야하기 때문이다. 권력층이라면 치부책 때문에 정쟁에 휘말려 목숨이 왔다갔다 하기도 한다. 이런 치부책이 날조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몇 달전 미국의 얼굴에 먹칠을 한 엔론(Enron)사태가 대표적인 경우다. 두말할 것 없이 기업의 내부거래 및 회계 조작이 주된 원인이었다.

▲우리나라는 국제적 위상에 비해 기업회계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다. 성장 주도 경제하에서 기업의 기여도가 지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이동에 국경이 없고 기업 주변에 이해당사자가 거미줄처럼 얽힌 세계화 시대에 기업회계는 투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최근 서울지법 민사 21부(재판장 손태호)가 내린 "기업의 분식회계를 묵인한 회계사도 투자자에게 거액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은 회계사의 투명성을 강조한 것으로 '좋은 게 좋다'는 식의 회계 관행에 쐐기를 박을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한 투자자가 낸 소송에 대해 "회사측과 회계사들은 허위로 감사보고서를 작성, 마치 재무상태가 건실한 기업인 것처럼 보이게 해 이를 믿고 투자한 일반인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며 "회사와 회계사들은 4억4천만원을 배상하라"고 밝혔다. 이 회사는 지난 99년 23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하자 허위매출표를 작성, 53억원의 흑자가 난 것처럼 조작했다. 회계사 2명은 10억원을 받고 이 같은 분식회계를 눈감아 준 것이다.

▲국내에서 분식회계는 해묵은 관행이었다. 과거 대우그룹의 분식회계로 산동회계법인은 문을 닫았다. 예금보험공사도 최근 대기업의 분식회계를 적발하지 못해 1천800억원의 공적자금 낭비를 초래한 공인회계사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검토중이다. 세계 최고의 투명성을 자랑하는 미국에서도 엔론 사태가 얼마든지 재발할 수있다. 문제는 사후 얼마나 단호한 법적 조치와 재발방지 노력이 뒤따르는가가 중요한 과제다. "향 싼 종이에는 향내 나고 생선 꿴 새끼에서는 비린내 나는 법"이다.

윤주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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