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습니다-황희 정승 얼마나 청빈했나

입력 2002-05-28 15:13:00

5월 3일자 매일시론에서 필자는 부패의 역사가 길다는 점을 말하면서 심지어 청백리 황희조차 부패에 연루되었으며, 실은 경기도에 넓은 땅을 가진 재산가였다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황태원씨는 필자의 황희 비판이 근거 없다는 반박문을 5월 22일자 매일신문에 실었다. 그 시론은 원래 최근의 부패 문제를 다루었고, 황희에 대해서는 잠깐 지나가는 이야기로 쓴 것이니 근거를 제시할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반박문이 나온 이상 해명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말부터 조선 문종 대까지 90 평생을 거의 관직에 있었고, 영의정만 18년을 지낸 황희 정승은 청백리의 대표격으로서 그를 칭송하는 자료는 매우 많다. 지붕이 비가 새서, 방에서 우산을 받고 있었다던가, 단벌 솜옷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아이들을 좋아해서 집에서 부리는 노비의 자식들도 귀여워했음은 그의 인품의 일단을 보여준다. 여러 자료를 종합해보건대 그는 훌륭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청빈의 대명사인 황희의 다음과 같은 면모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황희는 100명이 넘는 가솔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노비였다. 또한 10만평쯤 되는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의정으로서 후한 녹봉을 받았다. '세종실록'에도 황희에게 불리한 기록들이 있다.

"황희는…. 정권을 잡은 여러 해 동안에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아 뇌물을 받았으나, 운운…"(세종 10년 6월 25일). 또 "좌사간 김중곤 등이 상소하기를, '…황희는…박도에게 부탁하여 교하(임진강 주변 지역)의 전토를 얻었으니, 재물에 힘을 써서 그 집을 이롭게 한 것이 극심하옵니다'"(세종 13년 9월 11일)(정기문· '역사를 알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및 인터넷 '황희' 관련 자료 참조).

이런 사실은 사관이 기록한 것이니 아마 틀림없을 것인 바 우리가 알고 있는 청렴결백한 황희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청백리의 표상인 황희가 이러했으니 당시 탐관오리들의 부패와 탐학은 오죽했으랴.

물론 황희를 여느 탐관오리들과 비슷하게 봐서는 안 되고, 다른 관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깨끗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니 청백리로 선정되었을 것이고 각종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흔히 영웅, 위인의 생애에는 신화가 섞인다.

그들도 인간인데 왜 결점이 없으랴. 그러나 결점은 묻히고, 장점은 과장되는 쪽으로 각색되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웅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위에 인용한 기록들이 착오가 아니라면 황희도 거기에 예외가 아니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정우(경북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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