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오래된 이야기는 아니다. 동네마다 어른으로 모심을 받았던 분들이 계셨던 시절이 있었다. 동네의 어려운 일이며 이웃간의 문제들도 그 어른의 말씀 한마디로 해결될 수 있었다.
믿기지 않을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런 어른들이 계셨기에 동네 사람들은 서로의 마음을 열고 의지하게 되는 '마음의 끈'을 이어 갈 수 있었다.
◈남곡(南谷)어른에 대한 기억
내가 자랐던 산골 마을에도 어른으로 대접받으셨던 분이 계셨다. 그 어른의 함자는 남곡(南谷) 오기환(吳基煥) 선생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분은 동네 사람들 모두가 경모할 정도로 언행이나 식견은 남달랐지만 풍모만은 다른 노인들과 그렇게 큰 차이가 없었다.
자신만을 위한 금전적인 이익에는 몰두하지 않으셨다. 그저 보통 농부처럼 그렇게 농사일에 매달리셨던 분이셨다. 그러면서도 청교도처럼 절제의 삶을 살았던 어른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어른은 평소 말씀이 많으셨던 것도 아니었고 행동도 유별나게 특이하지도 않으셨다. 수도하는 학승 같았기에 가세가 부유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한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어린 나이에 고향집에 가게 되면 의레히 그 어른에게 인사 드리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다시 집을 떠나는 날 아침이면 그 어른이 직접 오셔서는 "가다가 요기나 해라" 하시면서 돈이 든 누런 봉투를 건네주시는 것이었다. 그 속에는 그저 우동 한 그릇 값 정도의 돈이 들어 있었지만 나는 그 돈의 가치를 아직도 상량하지 못하고 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때 그 누런 봉투를 받은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 시대 원로의 모습
나는 간혹 신문이며 텔레비전에 우리 시대의 원로라는 분들의 이름과 모습을 대할 때가 있다. 대통령이 외국 방문에서 귀국한 뒤 청와대에서 원로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었다는 뉴스도 그 속에 속한다. 그 때마다 어떤 분이 원로로 그 자리에 앉았는가가 궁금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궁금증 자체가 부질없다는 것을 곧잘 알게 되었다. 그분들은 '원로'일 수는 있어도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서 뵈었던 남곡 선생과 같은 어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요즘 들어 원로라는 말을 들을 때는 내 귀를 닫고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된다. 비록 소부 허유의 흉내는 내지 않아도 말이다.
여든이 다된 분들인데도 여전히 노탐에서 못 벗어난 그 모습에 그저 안쓰러울 뿐이다. 물론 노욕이라 해서 다 나쁠 수는 없다. 이웃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노욕도 있고, 국가와 사회를 위해 작은 것이나마 바치려는 희생적 노욕도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이러한 성격의 노욕이 아니라 그저 높은 자리나 훈작을 얻어 편하게 지내고 이름을 날리려는 그 노추함 때문이다. 원로로 불리는 사람들 모두가 다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 중 어떤 분들은 민주주의며 정의며 평화라는 말만을 줄곧 되뇐 것만으로, 또 어떤 이는 무슨 종교 단체의 장이기 때문에, 그리고 또 다른 이는 고만고만한 조직체를 이끌었기에 원로가 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더한층 놀라운 것은 그렇게 열심히 원로로 대통령의 초청이며 언론 기관의 대담에 등장했던 바로 그분들이 나이답지 않게 고위 요직을 차지해서는 문자 그대로 시위소찬으로 거들먹거리는 그 노추함에는 그저 고개를 외로 돌리고 싶어질 뿐이다.
◈노욕 3계
세상에는 늙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도 마음만은 몸 따라 늙지 않기에, 노욕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옛 어른들은 노욕삼계(老慾三戒)라 해서 첫째로 이름을 남기려 하지 말고, 둘째로 편당에 가담하지 말고, 셋째로 함부로 주장하지 말라고 가르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누구라면 알 어느 어른은 정년 퇴임하는 날 저녁 자식들과 제자들 몇몇을 불러서는 "내가 앞으로 자리를 탐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노망이 들었다고 생각해라. 그때는 내가 정상이 아니니 나를 병실에 가두고 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엄명했다는 것이다.
하기야 노인이 되어 남을 위해 이름 없이 일하는 것, 서로가 마음을 열고 손잡도록 노력하는 것, 외지고 힘든 사람들에게 친구가 되는 것,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그런 허물에 빠지지 않도록 젊은이들을 격려하는 것 등등의 일이야 정말 '아름다운 어른' 들의 몫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러한 일보다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노탐에 젖은 원로만이 있고 어른이 없는 사회라면 그것은 바로 그 '원로'들 때문에 참 어른들이 차지할 땅이 사라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화여대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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