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9월이면 열리는 달구벌 축제, 축제 후 걱정하는 음식쓰레기. 이것이 문화일까. 경산 자인면에서 열리는 한장군놀이. 이러한 전통문화가 문화일까. 아니면, 텔레비젼을 가득 채우는 감각의 제국, 혹은 영화관에서 '취화선'에 취하는 것이 문화일까.
알고 보면 이러한 것들은 문화'행사들'일 수는 있어도 문화가 아닐 것이다. 사실 마구잡이로 남용되는 탓에 문화라는 말만큼 그 뜻을 헤아리기가 지독하게도 애매한 말은 없을 성싶다. 관광문화, 축제문화, 음식문화, 대학문화, 정보문화센터, 영상문화, 사이버문화, 문화관광부 ,장례문화 등. 문화는 일종의 블랙홀이다.
모든 것들을 삼키고 스스로 없어지는 우주의 그물, 즉 크런치와도 같은 것이 문화다. 문화가 홍수를 이루는 것처럼 보여도 문화라는 말의 홍수는 있을지언정 정작 우리에게는 '문화'가 없다. 이것은 우리에게 사회라는 범주가 없는데도 한국'사회'라는 말을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이치와도 같다.
그러니까 문화'현상들'은 존재하지만 '문화적인' 현상들이나 '문화적인' 행사들은 없다는 말이다. 백화점이나 문화센터에서 시민들에게 열어놓는 프로그램들을 보면 이 나라를 사회로 가꾸어 나가기위한 공공성을 지닌 프로그램은 하나도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시대에 교양이란, 아니 문화란 아무리 헤집고 봐도 매튜 아놀드식의 무질서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교양은 당연지사로 찾을 수 없고 그저 꽃꽂이나 서예 등이 교양의 알파와 오메가로 치부되고 있을 뿐이다.
교양이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서구사회와 달리 우리에게는 그저 개인취미가 교양이요 문화인 것이고 수영장과 헬스클럽을 찾는 일이 교양인 탓인지 문화의 상업화 내지는 저질화, 교양의 개인화 수준을 한 치도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는 거의 20세기 한 세기를 '체력은 국력이다'라는 구호 밑에서 살았다. '건전한 몸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구호의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지만 이제는 상당히 퇴색하고 그 자리를 다시 '건전(강)한 문화'라는 말이 이어받았다. 문화체육부가 문화관광부로 바뀐 것도 마찬가지다. 이제 몸 하나는 충분히 건사해 튼튼해졌는지 문민정부 이후 문화(관광)가 체육의 자리를 대체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 후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이제 문화가 경쟁력, 산업 같은 단어들을 넘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건강'이라는 수사법은 '건강하게' 남아 있다. 몸의 건강에서 문화의 건강으로 이동한 것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건전한 정신이나 건전한 몸이나 건전한 문화는 건강이라는 수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몸은 술 담배로 찌들어도 정신은 생생하고 건강할 수 있는 것인데도 건강과 건전이라는 말은 우리시대에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해서, 문화가 이러한 말들의 수사법에 찌들어있는 한 문화행사가 넘쳐나고 문화현상이 우리의 오감을 압도한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문화가 없는 것이다. 문화는 건전/불건전이라는 이분법의 모태도 아니고 그런 말들을 통해 일제의 침략과 적과의 싸움에 동원되어 왔던 도구도 아니기 때문이다.
위생관념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채 '건전' 이외의 것들은 모두 소독해버리는 문화야말로 항체를 생산해낼 수 없는 약하디 약한 문화일 터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광주에서도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가 출범했지만 대구.경북에서는 감감 무소식이다.
먹구름으로 덮힌 지역경제를 살리려면 문화인프라를 프로그래밍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아직 우리의 문화는 그저 먹고 마시며 쓰레기 처리문제나 고민하는 '소비'문화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에 하는 말이다.
이득재(대구가톨릭대 교수.노어노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