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살가운 손길 새삼 그립습니다

입력 2002-05-08 14:00:00

굽은 허리로 천천히, 하지만 끊임없이 자분자분 일을 하는 할머니. 말못하는 시골 외할머니와 7세 손자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집으로…'에 나오는 할머니의 모습이다. 영화속 손자는 방안에서 롤러 블레이드를 타거나 하루종일 게임만 하고, 닭튀김을 해달라는데 백숙을 해온 할머니에게 '땡깡'을 부린다.

지난달 말 제4차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 50년 생이별을 했던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혹 그때 애인과 함께 도망간 것은 아니냐"고 바가지를 긁어대는(?) '넋새(한을 담은 새라는 토속어)할머니'의 모습에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사람들은 왜 이 밋밋한 영화를 보려고 줄을 서고, 넋새할머니의 눈물에 함께 공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잊고 있었던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속 손자는 우리의 어린 시절 모습일 수도 있고 가없는 사랑을 주는 외할머니는 우리 모두의 외할머니일 수도 있다. 2박3일의 짧은 만남 끝에 작별 상봉장에서 오열을 터뜨리고 만 넋새할머니의 설움에서는 진한 여운을 함께 느끼게 된다. 가정의 달 5월. 한평생 가족들을 위해 몰두하다가 익숙했었던 모든 역할들을 내놓으신 할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이, 신산했던 삶에 대한 가여움이 새록새록 돋는 것도 이즈음이다.

할머니들은 품안의 자녀들이 이미 떠나가 버리고 자신에게나 주변 사람에게나 존재가치마저 희미해져 가지만 할머니의 가슴엔 피붙이에 대한 살가운 정이 부대낀 세월만큼 차곡차곡 쌓여 있다. 할머니 얼굴과 겹쳐지는 우리 이웃들의 단상들을 모아봤다.

군밤.계란밥 못잊어

#1"할머니는 손자 돌보기와 집안일에다 농사일까지 억척스럽게 해낸 집안의 '숨은 어른'이었죠. 지금 생각해도 맡겨진 역할을 어느 하나 빠뜨림없이 꾸려나가며, 집안을 화목으로 이끈 보이지 않는 손이셨어요. 쇠죽 끓일때 가끔씩 만들어 주시던 계란밥과 군밤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투정 달래려 10리길 달려

#2"시골집의 할머니는 방학때나 돼야 내려오는 나를 위해 항상 베개를 따로 보관해 두셨죠. 굴렁쇠를 가지고 놀다 부러지면 투정하는 나를 달래기 위해 10리길 큰장까지 나가 고쳐주시기도 하고…. 대구로 돌아가는 나를 차창밖에서 눈물을 흘리며 하염없이 지켜보시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합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용돈 조금 드리는걸로 위안을 삼고 있어 죄송스러워요".

쌈짓돈으로 손자 도와

#3"4대가 함께 사는 30여명 대가족의 맏며느리이자 시어머니이기도 하셨죠. 중학교때까지 할머니에게 손을 벌리면 치마속 쌈짓돈을 꺼내 손자의 다급함을 해결해주시곤 하셨어요. 어머니에겐 엄하디 엄한 불호령을 내리기도 하셨지만 저희 형제들에겐 한없는 사랑을 듬뿍 주셨답니다".

외할머니덕에 위기모면

#4"군입대전 서울에서 직장을 잡게되자 외할머니가 올라오셨더랬습니다. 외삼촌 양복을 살짝 입고 외출한 어느 겨울날 외삼촌이 먼저 귀가하자 대문밖에서 나를 기다리시며 혼쭐이 날뻔한 위기를 모면하게 해주신 일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손자.손녀 구분없이 사랑

#5"지금 92세된 외할머니는 옛날엔 남자 밥상만 따로 차려주는 완고한 할머니였어요. 저는 손녀라서 자랄때는 할머니 정이 얼마나 깊은 줄 몰랐지만 지금 되돌아보니 꼭 그런것 만도 아니었나 봐요. 요즘은 아들손주보다 딸손주를 더 챙기신답니다".

노진규기자 jgroh@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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