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아까운 학자였어…" "대구서단의 기둥을 잃어버린 상실감이 아직도…".
호림(湖林) 채용복(蔡龍福)은 지난해 2월 대구예술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도중 만 49세의 나이로 급서했다. 대구예술대 서예과 교수였던 그는 서예 평론가가 드문 국내 서단에서 총망받는 젊은 학자였고, 초서(草書)에도 남다른 경지를 보였던 서예가였다.
"그가 좀더 살았더라면 국내 서단이 이론적으로 더욱 발전했을 겁니다". 대구예술대 서예과 동료 교수이자 친구였던 백영일(48)씨는 그의 죽음에 아쉬움을 토로했다.
대구예술대 교수, 학생, 동료 서예가들은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30일부터 5월 6일까지 봉성갤러리(053-421-1516)에서 '호림 채용복 교수 유고집 출판기념회 및 유작전'을 연다.
유고집에는 그가 쓴 서예논문 10편과 '자연은 임자없는 주인이다'는 수필이 실려있다. 그는 논문에서 중국 명말의 서예가 동기창(董其昌), 조선중기 대가 황고산, 고려중기 서예가 등 서예가들의 글씨를 분석, 국내 서예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데 힘썼다. 그는 민간에 전하는 조선중기 눌옹(訥翁) 송석충의 문집에서 특이한 예서체를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백영일 교수는 "그는 10여편의 논문을 통해 한국서예의 가치정립을 위한 서막만 열어놓은 채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갔다"고 아쉬워했다.
호림이 남겨놓은 20점의 유작도 관심을 끈다. 그는 활달하고 힘있는 필체의 초서를 주로 썼으며 중국 소수민족이 사용하는 납서(納西)문자와 고문자를 응용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번 유작전에는 서예가 노상동 권시환 최민렬씨가 작품 등을 후원했다.
서예가 서산 권시환(52)씨는 "그는 낙천적인 성격이었지만 무척 다재다능하고 박식한 사람이었다"면서 "10여년간의 고달픈 대학 시간강사 생활중에도 2천여점의 간찰(簡札)을 사모아 서체를 연구하는 등 서예와 한문학에 정열을 불태운 학자였다"고 말했다.
또 그는 2년전 예술의 전당에서 '한국서예 2천년전'을 열 때 전시된 안평대군의 글씨가 위작이라고 주장, 서예계에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서체 연구가 상당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는게 동료들의 회고다.
그는 경북대 독문과 재학시절 서예에 입문했고 86년부터 전국 최초의 서예학술 단체인 대구서학회를 함께 창립해 중심적으로 활동했으며, 98년 대구예술대에 전임강사로 임용됐다.
박병선기자 l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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