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인구의 3분의1은 가야의 후예

입력 2002-04-19 14:21:00

가야사(加耶史)가 우리 역사 속에서 외면 받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통일신라와 고려 이후에 고착된 '삼국시대'논리 때문이었다. 이수광.안정복 등 조선시대의 실학자들이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사국시대론을 제시했으나, 임나일본부설을주장한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다시 왜곡되고 말았다.

1970년대 이후 고고학의 발달로 가야의 풍부하고 수준 높은 유물들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가야를 경시하고 가야사를외면하는 논리들은 계속됐다. 일본 고대사와 백제사.신라사 중심의 논리에서 본 가야사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었다.

가야가 허약했다는 오랜 편견과 일제의 식민사학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은 그래서 가야가 독자적인 문화를 영위한 세력이었고 가야를배제하고는 한국 고대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데 있었다.

도서출판 푸른역사에서 펴낸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전 3권)는 그같은 노력의 결실에 다름아니다. 1천500년 전의 신비를400여장의 화려한 이미지 자료로 엮은 이 책은 가야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홍익대 김태식 교수가 이뤄낸 가야사의 집대성이자 일반인의 눈높이에 맞춘 가야사 개설서라 할만하다.

이 책의 핵심적인 주장은 4가지이다. 우리 고대사는 삼국시대가 아닌 '사국시대'라는 것과 남한 인구의 1/3은 가야의 후예라는 것, 가야가 왜나 백제의 지배를 받았다는 주장은 넌센스라는 것, 그리고 가야사 복원이야말로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가야 정권의 독립적 성격을 논증하는 각종 문헌과 고고학적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가야사를4세기 이전 김해 가락국 중심의 전기 가야사와 5세기 이후 고령 대가야국 중심의 후기 가야사로 크게 나누면서, 수로왕 신화.허왕후 결혼 설화.월광태자 전설과 수로왕릉.허왕후릉.해인사.월광사 등의 가야 관련 사적을 총정리했다.

맹주국을 중심으로 한 연맹체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시대사와 정치.경제.사회.사상 등을 나타낸 분류사, 가야를 구성했던 32개국의 역사 등잊혀진 가야사와 미완의 문명을 재현했다.

결론적으로 가야는 기원전 1세기의 소국 성립 당시부터 6세기 중엽의 멸망 때까지 700년 동안 완전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를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의 소국 연맹체제를 유지하면서 독립적인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또 같은 시기의 백제나 신라지역에서 출토된 고분 유물들과 비교해 볼 때, 유물의 질과 양에서 또 유물을 만들어낸 사회기반과 기술력 측면에서 백제.신라.왜국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는 것이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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