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시론-오이디푸스의 정치

입력 2002-04-19 00:00:00

IMF 이후 정부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만들고 공공근로사업을 하며 서민들을 위해 뭐 좀 일을 하는가 싶더니 결국은 아버지-아들의 관계라는 그물에 걸렸다. 과거 김영삼 정권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금융실명제 등으로 '무늬정책'을 펴다가 막바지에 아버지-아들의 그물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여당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야당총재 또한 아들 병역문제가 나타났고 아들도 모자라 손녀, 아버지, 사돈문제까지 불거졌다.

아버지(총재)-아들, 아버지-아버지, 아버지-손녀, 아버지-사돈 이야기는 이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최근 민주당 경선에서 가족구성원들 사이의 관계문제는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장인 이야기로 이어졌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가족이야기가 나올지는 몰라도 한국사회는 그야말로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가족소설의 소재감이 될 참이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정치인들의 신상문제라고 치부할지 모른다. 정치인도 가족을 거느리는 가장일 터이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은 한국사회가 오이디푸스의 정치적인 덫에 걸려 있고 이 덫을 풀지 않는 한 한국사회에는 '사회'가 없다는 비극적인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오이디푸스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아버지로부터 유기당한 자식의 이름이다.오이디푸스는 이 신화에서 친아버지를 몰라보고 죽이게 된다.

우리의 정치현실에서 오이디푸스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지만 아버지들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아버지들의 정치적인 죽음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아버지들의 상징적인 죽음이 아니라, 우리의 정치가 수십년 동안 가족소설만 써오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그 이야기가 일깨워준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보기에, 우리 정치의 후진성은 색깔론이나 지역주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서 작동하고 있는 '가족소설이라는 장치'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장치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지배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한국재벌에서 나타나는 강한 부계계보는 유교식 자본주의로 치부될 문제가 아니라 황사바람처럼 한국사회를 뒤덮고 있는 가족과 가족의 대표자인 아버지, 아버지의 자리를 잇는 장남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한국사회의 35개 재벌의 경우 모조리 남동생, 처, 장남, 사위, 손자 등에 이르기까지 사돈의 팔촌을 망라하는 수준으로 가벌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있다.

그래서, 결국 정치든 경제든 아니면 교육이든 거대한 한 일가의 사적 소유물로 전락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시민들이 그토록 정치에 염증을 느낀다면, 그것은 연일 싸움만 벌이는 국회의원들의 실랑이나 일제식민지와 냉전의 상처를 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다시 후벼파는 잔혹한 색깔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치면역증은 바로 정치가 내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고 당신들 가족소설에나 나오는 '당신들의 정치'라는 심리적인 격리감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닐까.

때문에, 정치인들이 가족이 아니라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를 정책으로 구체화하는 아젠다를 형성시키지 않는다면 한국사회는 가족소설의 마법에서 풀려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마법은 정치인을 정치적인 죽음으로 몰아갈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오이디푸스의 운명처럼 유기시킬 것이다.

최근에 불고 있는 소위 '노풍'은 가족의 대표자인 아버지들의 정치적인 무능력을 질타하는 자식들의 소리없는 항변이긴 하지만, 그 항변이 사회적인 아젠다를 향하지 않고 훗날 정치인들의 가족이야기나 또 듣게 되는 식으로 막을 내린다면, 그 때 '나의 운명'은 어찌되는 것일까?

(이득재·대구가톨릭대 교수·노어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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