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덕의 대중문화 엿보기

입력 2002-03-28 15:37:00

"정말 영광스럽습니다. 많은 유색 여배우들을 위한 위대한 순간입니다".아카데미영화제 흑인 여우주연상 핼리 베리는 감격의 순간에도 할리우드의 영화공식을 잊지 못하는 듯 했다. 미국영화의 법칙은 '인종차별'. 대부분의 영화에서 백인이 주인공이고 유색인종은 범죄자나 하인과 같은 들러리다.

아니면 경제적인 능력과 함께 인성까지도 괜찮은 백인 청년이 어려움에 처한 흑인 처녀를 도와준다는 식의 백인우월주의가 은밀하게 포장된다. 하지만 지난 24일 밤의 아카데미상은 달랐다.

'백인들만의 잔치'라는 비아냥거림을 받던 과거와는 바뀐 모습이었다. 인간의 행위를 사회가 바라는 방향으로유도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는 상(賞). 문화산업에서는 자연발생적이기보다는 인위적으로 특정행위에 보상을 주는유인시스템이다. 관객의 호주머니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식을 강조하는 예술성 작품을 제작하게 하는 체계다.

상업성을 추구하는 문화산물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미학적 질이 높은 문화상품의 완전 퇴출을 막는 제도다. 물론 부작용도 있다. 자본주의 논리는 여전하고 국수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심사위원들의 편견도 문제다. '미인 선발대회'에서 백인이 유리한 것과 같은 이치다. 사람들이 유명브랜드나 KS마크에 신뢰를 보내는 까닭은 상품의 명성을 인정해서다. 명성은 소비와 직결된다. 불완전한 정보상황에서 상품을 선택하는 중요한 척도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상품을 선택하거나 차선의 상품을 확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명성이다. 문화산업에서도 마찬가지. '오스카'라는 애칭이 담겨 있는 약 60달러에 불과한 트로피지만 상업적 가치는 블록버스터와 맞먹는다.

수상 사실 하나만으로도 수억 달러 이상의흥행수입을 보장받는다. '쉰들러 리스트'는 작품상을 받은 다음날 흥행수입이 하루 전에 비해 150% 뛰어올랐다. '플래툰'은 수상과 함께1억 3천80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다.

올해 아카데미 영화제의 최대이변은 74년 역사이래 최초의 흑인 남녀배우의 주연상 수상. 제도권 언론들이 인종의 벽을 넘어선 아름다운 충격이라고 흥분할 만 하다.

하지만 이를 우연의 결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이 땅에서 소외된 이들이 지닌 열망의 산물이고 투쟁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대중의 바람이 이변이나 바람으로 조작되는 이유는 단 하나. 대중은 끝없이 흔들린다는 미신 때문이다. 대중의 움직임을 좌우하는 것은 필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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