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폐 갈림길에 선 고교평준화

입력 2002-03-22 00:00:00

고교 평준화 정책에 대한 논란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평준화에 대한 문제 제기는 수년간 잠잠했으나 지난 연말 이후 재정경제부와 한국개발연구원(KDI) 등에서 잇따라 조사 자료를 제시하고 폐지 주장을 펴면서 촉발됐다.

올해부터 평준화가 실시된 부천, 안양, 과천 등 수도권 신도시 지역에서 배정 오류 사태가 발생하자 학부모들이 아예 평준화 폐지를 요구하고 나섰다.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가 지난 18일 평준화 폐지를 공식 주장하는 등 시민단체의 요구가 거듭되고 있는 가운데 학부모 10명이 19일 "교육을 받을 권리와 행복 추구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내면서 법적 논란까지 예견되고 있다. 논란의 쟁점과 대안을 짚어본다.

▨논란의 초점

현재 평준화에 대해 제기되는 비판은 크게 △학력 하향 평준화 △학교 선택권 제한 △공교육 붕괴 △사교육비 증가 등으로 볼 수 있다.

논란의 핵심이 되는 학력 문제에 대해선 맞다 틀리다 양론이 엇갈리고 있다. 조사 결과도 제각각이다.학력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조사결과로는 지난 99년 가톨릭대 성기선 교수 등이 전국 고교생 10만명을 대상으로 한 분석이 대표적.

성적 집단별로 봤을 때 평준화 지역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는 상위권의 경우 비평준화 지역에 비해 0.78% 떨어지지만 중위권은 1.64%, 하위권은 7.52% 높다는 것. 즉 평준화로 인해 상위권은 성취도가 다소 떨어지지만 중.하위권은 월등히 높아지므로 전체적으로는 학력이 향상된다는 결과다.

평준화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상위권 학생들의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집중 거론하고 있다. OECD 27개회원국을 포함한 32개국의 만15세(고1)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학업성취도 비교연구에 따르면 한국 학생들의 평균적인 학업 성취도는 읽기 6위, 수학 2위, 과학 1위로 아주 높았다.

그러나 국가별 최상위 5% 학생만 따졌을 때 한국 학생들은 읽기 20위, 수학 6위, 과학 5위로 떨어졌다. 이같은 근거를 내세우며 경제부처는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봤을 때 국제사회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인재 양성이 필요한데 평준화가 이를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공교육 붕괴나 사교육비 증가를 보는 시각도 평준화 찬.반론은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평준화를 폐지하자는쪽에서는 학교 교육과 학생의 수준이 떨어지면서 사교육 의존율이 높아지고, 그만큼 공교육이 부실해졌다고 비판한다. 우리 사회에서 사교육에 대한 수요와 생명력은 엄청날 정도로 높고 끈질기기 때문에 사교육 근절을 명분으로 한 평준화는 실패가 예견된 정책이라는 것.

반면 교육부와 교원단체 등은 고교 평준화가 깨지면 중학교 때부터 입시에 매달리는 상황이 빚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고교 뿐만 아니라 중학교 교육의 기반까지 뒤흔든다며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실제로 비평준화 지역인 경북의 경우 포항, 구미 등에서는 중학교 때부터 학원 수강이나 과외에 매달리는 입시 열풍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어 참교육 학부모회 등에서 평준화를 요구하고 나서기도 했다.

▨대안과 전망

평준화 제도를 반대하는 측에서도 급작스런 폐지가 엄청난 혼란을 부르리라는데는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통해 평준화의 문제점을 해소하고 개선해나가느냐에 논의가 쏠릴 수밖에 없다.우선 교육부는 자립형 사립고 확대, 공립 자율학교 도입 등 학교교육의 다양화를 보완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작년에 5개가 지정된 자립형 사립고를 30개 이상으로 늘리고 실업계고와 농어촌 지역에만 도입된 자율학교도 향후 대도시 일반계 공립고까지확대한다는 것.

그러나 자립형 사립고의 경우 또다른 형태의 입시 과열과 빈부 격차 문제 등 심각한 문제점을 야기하리란 우려가 큰데다 허용조건이 까다로워 제대로 성과를 거두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공립 자율학교나 고교 특성화 등의 대책도 큰 기대를 걸기 어렵다는게 교육계 반응이다.

올해 들면서 정치권에서도 고교 평준화 폐지 여부에 대한 입장 정리가 시작되면서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기조는 크게 평준화의 기본틀은 유지하되 사립학교부터 단계적으로 풀어나가는 쪽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것. 민주당 일부 의원들도 교육부의 보완책 정도로는 현재의 문제점을 해결하기에 미흡하므로 제도의 수정.보완을 위한 기구 설치 등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고교의 절반 이상이 사립인 점에 비춰볼 때 사립부터 평준화를 해제하자는 것은 전체적인 평준화 해제나 다름없는 주장이라는 비판이 적잖다. 특별기구의 실효성도 의문스런 대목이다.

교육계에서는 학교 운영의 자율성 보장을 현 시점에서 실현 가능한 최선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교육부와 교육청의 간섭과 통제로 인해 학교장이 학교 운영에 대한 권한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는 현 체제 아래서는 아무리 좋은 보완책을 내놓더라도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것. 학교장을 중심으로 지역 특성과 학교 실정, 학생과 학부모의 요구에 맞도록 단위 학교 운영을 다양화하는게 효과적이라는 얘기다.

아울러 교사와 학부모 등 다양한 교육주체가 학교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 자체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해가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도 많다. 학교 내 또는 지역내, 지역간 학력 격차 등의 문제는 학교에서부터 푸는 게 가장 효과적이고 부작용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

교육당국은 공교육에 대한 전반적인 투자를 확대하는 한편 현실적으로 뒤처진 학교나 지역에 대해 지원을 늘리는 정책을 통해 문제를 줄여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