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석귀화의 좋은 시 읽기

입력 2002-03-11 15:46:00

재수한 아들이 입학식 간다고 새벽에 나선다. 6시 반이다. 나는 잠에 취해서 건성으로 인사를 받았다.왜 새벽에 가냐니깐 수강 신청이 선착순이라 일찍 가야 한단다. 그런데 나서면서 하는 말, "어머니 저도이제 대학생입니다". 그 말에 가슴이 아렸다. 그리고 30년 전의 내가 떠올랐다.

나도 30년 전 이 아이와 똑 같은 학원에서 대입 재수생활을 했다. 재수생 학원은 왜 그런지 30년 전과 지금이 크게 변한 것 같지 않았다. 교실 크기에 비해 많은 수용 인원, 좁은 의자, 그리고 부족한휴식 공간과 통로, 그러나 이 곳이 유명한 데라서 학생이 몰려 그렇단다.

나는 재수할 때 그늘만 찾아 다녔다. 대학생이 되어 다니는 친구들 보기 부끄러워 그들이 찾아오지 않는 이상 만나지도 않았고 때로는 전쟁 나면 어쩌나 걱정도 했다. 그 이유는 내가 혹 대학생이 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할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아들은 재수생활을 씩씩하게 잘 견디는 것 같았다. 물론 마음을 다치게 할까 봐 신경을 쓰기는 했다.눈치 없이 아이 구박하는 말 툭툭 던지는 제 아빠를 꼬집어 준 점이 그것이다.

이 새벽 아들이 떠나면서 내게 던진 말, '저도 대학생 됐어요' 이 한 마디는 녀석에게도 이 일 년이 얼마나 지루하고 괴로운 기간이었던가를 내게 일깨워 주기에 충분한 함축이 담긴 말이었다. 우리 모자는 표현하지 않았지만서로의 감정을 읽고 있었던 것이고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무심을 가장했던 것이다.

올해 우리시교육청 역점 추진 과제에 '좋은 시 읽기'가 들어가 있다. 어떻게 보면 좋은 연극 보기는 왜 안 되고 좋은 그림 보기는 왜 아니며 하필 좋은 시 읽기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아들을 배웅하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어떻게 하면 '과부 마음 홀아비 안다'는 동병상련의 체험 없이도불우한 처지에 빠진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보가 길러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남의 아픈 처지를 살피는 지혜가 길러질 수 있을까.

이게 시 읽는 생활을 통해 가능하기 때문에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나 싶다. 시를 읽고 자란 사람이 비정한 인간이 되기는 어려울 테니까. 내가 국어선생이라 점수를 좀 후하게 매겼나 싶기도 하다.

경북고 교사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