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동계올림픽 경기에서 한 미국 선수의 제스처 탓에 메달 순위가 뒤바뀌었다. 순간적 상황에서 그의 계산된 너스레인지 아니면 제스처가 몸에 베인 미국문화 덕일까.
본래 제스처는 몸짓이나 눈짓을 뜻한다. 배가 부른 시늉이나 유혹적인 윙크도 모두 제스처다. 말이나 글보다도 먼저 생겼을 터이니, 가장 기본적인 의사표현 수단이다. 때로는 직설적이기에, 언어보다도 더 원초적이며 효과적이다.
물론 제스처는 개인에 따라 정도가 다르고, 문화권에 따라 종류도 다양하다. 대개 제스처하면 금방 서양인의 허풍스러운 몸짓을 떠올릴 만큼 서구권에서 더 요란하다.
문제는 제스처가 대개 모호하거나 과장된 구석이 많은 불확실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라는 것. 본래 언어적 기능이 되기 위해서는 그 뜻을 주고 받을 때 내용과 표현이 일치해야 한다. 암호풀이가 정확해야 된다.
우리에게는 별 뜻이 없는 손가락 동작 하나도 자칫 서구인에겐 지독한 욕이 되고, 심지어 옳다와 그르다의 몸짓이 정반대인 민족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이러하니 때론 성희롱의 시비에 휘말리기도 한다.
즉 제스처가 지닌 해석의 다의성 문제이다. 더구나 제스처는 우스운 판토마임이나 엄살 떠는 레슬러처럼 가식적인 경우도 많다.
속은 아닌데 겉으로 마지못해 보여주는 시늉은 위선적이고 거짓부렁이이다. 난 모른다며 어깨를 으쓱거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뒤바꾸기 쉬운 것도 제스처가 지닌 애매함 덕분이다. 이는 제스처가 통하는 적용의 기회성 문제이다.
오노 선수의 제스처는 과장을 통해서 보여준 자기 표현이되, 해석이 틀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기회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심판이 속았든 말았든 순전히 오노 탓은 아닌 것이다. 이쯤 되면, 제스처는 교묘한 장치인 셈이다.
나아가서, 이러한 속성 덕분에 제스처는 인간적 표현을 넘어서서 이제 현대 디자인의 한 특징이 되었다. 우리의 도시에도 제스처가 존재한다. 본질적인 건축이나 진솔한 조경이 아닌 모호하고 과장되고 유희적인 도시풍경이 그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풍경조작의 의도가 얕은 잔꾀에서 나오는 경우다. 겉은 멀쩡하나 속은 검은 위선적인 광고간판도 문제이며, 차거운 본심을 위장한 가면과 같은 도시건축도 문제이다. 제스처가 범람하는 우리 사회,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김영대(영남대교수 조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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