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결에 달력을 올려보다가 우수가 지나고 경칩이 가까웠다는 생각이 새삼스러웠다. 그러면서 눈길은 어느새계곡 물소리 한결 낭낭해진 창 밖에 머문다.
새봄의 햇살이어서일까, 아니면 새봄과는 거리가 먼 연륜으로 바라보는 봄볕이기 때문일까. 다가오는 파장이 보일 듯한 빛살은 눈이 부시게 곱고 투명하다. 한순간, 회의를 머금은 아픔 같은 것이 날을 세우고 가슴을 스쳐간다.
수많은 사람들의 온갖 희망과 소망과 환희가 기포처럼 떠다닐 것 같은 봄날 아침에 이 무슨 애매하고 엉뚱한 감상이란 말인가.나의 가슴을 터무니없이 쓸리게 한 이른 봄날의 찬란한 햇살.
그 모호한 감상의 발원을 더듬어 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나저제나 하고 쓰다가 미루어 둔 편지와 무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봄날의 찬란한 햇살
수신인의 이름으로 미리 쓰여져 있는 나의 친구는 지난 학기에 삼십여년의 평교사 봉직을 마감하고 교단을 내려섰다. '명예로운 퇴임'이라는 축하에 자조 섞인 냉소를 남기는 것으로 친구는 나의 군색한 노력을 덜어주었다. 친구의 가당찮은 여운이 아니더라도 나 또한 씁쓸한 앙금을 걷어내지 못한 채, 축하를 할 수도 그렇다고 위로의 편지를 쓰기에는 더더욱 자존심이 용납되지 않는부담이 있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던 그해 3월, 우리는 지체 없이 교사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임지가 어디이든 발령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거기다 우리가 인근 학교에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아이들처럼 다랑귀를 뛰며 좋아했었다.
서로 고만고만한 이불 둥치를 꾸려서 시외 버스정류장에서 만나던 날도 시작의 기대와 설렘을 감추지 못한 우리는 낯선 사람들의 언짢은 눈총을 감수해야만 했다. 모르긴 해도, 그만한 나이 또래의 요즘 젊은이들이 외국여행을 떠난다고 해서 그렇게 좋아들 하겠는가. 비록 촌스럽고 가난이 묻어나는 봇짐이었지만 그 가난 속에는 오늘날의 풍요가 잃어버린 행복이 꼭꼭 묶여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날로부터 일 년간, 아마도 친구와 나는 평생을 살면서 주고받을 수 있는 편지나 전화를 거지반 해버렸을 것이다. 시골 하숙방에 엎드려 쓴 편지가 배달되고 그도 모자라 잡음이 윙윙거리는 전화통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일을 매일같이 거듭하였다. 우리가 맞이하는 나날이 무엇 하나 새롭고 즐겁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니 잠자코 배겨낼 재간이 있었겠는가.
◈언제나 새롭고 소중한 '봄'
우리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의 신명은 생경하고 버겁고 능란할 수 없는 생활을 감당하기 위한 자구책에 다름 아니었음을.
한편, 그것은 눈치는커녕 요령이나 잔재주 피울 생각조차 내지 못한 새내기가 까마득한 선배 선생님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된덕목이 아니었던가 싶다. 가끔,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향수에 저리는 것은 나에게 다가와 있는 어떤 소외를 은연중에 힘들게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 하루도 아무 일 없었던 양 넘기지 못하고 우리가 주고받았던 수많은 말들 중에는 무엇이 되든 마지막까지 가보자던 약속도 들어 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친구를 타박하질 못하고 나는 어정쩡한 말들만 늘어놓은 편지를 마무리해야 한다.조금 더 세월이 흐른 다음 내가 받게 될 친구의 답장은 어떠할까, 벌써 궁금한 마음이 앞선다.
어두운 편지의 겉봉을 붙이고 다시 바라본 봄날의 눈부신 햇볕. 그것은 우리들 가난하고 초라했던 이불 보퉁이에서 기대와 설렘으로반짝이던 그날의 봄은 정녕 아니다. 하나 나에게 남아있는 많지 않은 봄날 중의 하나라면 소중하고 소중할 뿐이다.
이제 곧 망각의 빛깔로 개나리가 피어나리다. 해마다 맨 먼저 개나리가 오던 날 잊지 않고 소식을 보내주던 친구는 개나리를 어디에서 보게 될까.개나리와 함께 오는 봄, 올해부터는 내가 개나리 편지를 써야 할 차례인가 보다. 우리가 맞는 봄은 언제나 '새봄'이라고.
백정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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