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랑 자녀랑-원렬이네 가족 영화 만들기

입력 2002-02-27 14:01:00

'촬영 허상수, 나레이터 허원렬, 음향.감독 어머니, 제목 즐거운 우리 집'.25일 저녁, 원렬(대구 대서초 2년.달서구 송현동)이네 집에서는 8mm 단편영화 시사회가 열렸다. 관객이라곤 가족과 취재기자 뿐이었지만 가족의 첫 작품인 탓에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

울퉁불퉁하지만 집 주위 어느 것 하나도 빼놓지 않은 상수(7)의 그림이 맨 먼저 비춰지는 가운데 잔잔한 음악 위로 원렬이의 다소 엉뚱한 나레이션이 흘렀다. "설날 상수랑 연날리기를 붙었는데 내가 이기자 상수가 화를 내 한판 붙었다".

나레이션과 영상은 어긋났다 맞았다 했지만 화면에는 쇼트트랙 김동성 선수의 사진과 별자리 그림, 로켓 사진, 신문광고에 실린 아기 사진 등이 다채롭게 잡혔다. "우리 가족의 희망을 실은 로켓이 불을 뿜으며 날아갔다. 올해가 끝날 때 엄마는 병원에서 아기를 낳아 데리고 올 것이다"라는 이야기와 함께 가족 영화는 끝을 맺었다.

스크린 소개에서는 빠졌지만 극본은 어제밤 온 가족이 완성했고, 촬영에 쓰인 신문과 잡지의 사진들이며 그림도 가족이 함께 만들었다. 초등학생과 유치원생 형제가 전업주부인 엄마와 함께 제작한 10분짜리 첫 영화치고는 나름대로 갖춰진 작품이었다.

이어진 화면은 원렬이가 혼자 촬영한 '우리 집 주변 풍경'이었다. 아파트 입구 분리수거함들의 화면이 스친 뒤 엉뚱하게도 경비 아저씨가 등장했다. "캔이나 플라스틱 같은 재활용품들은 분리 수거해주시고, 음식물 쓰레기도 구분해 버려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아저씨의 어색한 웃음 뒤로 어린이 놀이터의 전경이 잡혔다. 촬영 내내 "팔 아파"라며 징징대던 상수의 화면이 다소 흔들리던 것과 달리 원렬의 화면은 상당히 안정돼 있었다.

뒤이어 엄마 남정순(36)씨의 작품이 상영됐다. 작년 9월 구미서 열린 한국지능로봇경진대회에 구경갔다가 찍은 내용. 로봇의 움직임을 따라잡으며 출품자들의 설명까지 생생하게 담은 것이 교육용 비디오로도 손색 없어 보였다.

원렬이네 가족이 영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작년 봄. 캠코더를 구입했지만 막상 아버지가 회사 일로 바빠 쓸모가 적자 엄마가 손에 쥔 것. 처음엔 켜놓은 상태로 들고 다니기도 할 정도로 서툴렀지만, 캠코더 회사에 전화를 걸어 자세한 사용법을 설명 들어가며 차츰 촬영에 익숙해졌다.

올해 들어서는 남부도서관을 비롯한 몇몇 기관에서 열리는 영상교실에까지 참가하면서 재미를 붙인 남씨는 최근 원렬이 형제에게도 캠코더를 맡기는 용기를 냈다.

"값이 만만찮은 물건이라 어린 애들에게 맡기기가 부담스러웠어요. 하지만 건성으로 봐 넘기던 주위 사물들을 훨씬 자세히 관찰하며 영상에 담아내는 모습을 보면 참 잘 했다 싶어요". 얼마전 대구수목원에 갔을 때는 나무며 꽃들을 화면에 담느라 한시간 넘게 걸릴 정도였다는 것.

평소 같으면 10분도 안 돼 나가자고 조르던 형제의 변화에 남씨는 초보 단계지만 스토리가 있는 작품을 만들기로 작정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날 시사회를 가진 '즐거운 우리 집'이었던 것.

"단순히 가족의 모습을 영상에 담기보다는 그때그때 스토리를 담아 영상을 만들어갈 생각입니다. 교육적으로 유익한 전시회나 행사 같은 것도 영상으로 남겼다가 수시로 보여주고요.

그 과정에서 애들이 쑥쑥 자라줬으면 더없이 좋겠죠" 남씨는 내친 김에 디지털 편집을 배울 계획이라고 했다. 아직은 초보 촬영자라며 부끄러워했지만 "집에 캠코더가 있다면 엄마들이 먼저 들고 나서 보세요.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겁니다"라며 웃어보였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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