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파일 이곳-설 앞둔 서문시장

입력 2002-02-07 14:00:00

코흘리개 어린 시절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따라갔던 설대목 시장은 진귀한 보물창고였다. 군침을 잔뜩 흘리게 하는 온갖 먹을거리와 때깔나는 새옷, 팔뚝보다 굵은 어물(魚物)과 수북히 쌓인 탐스런 과일, 그리고 잔치마당처럼 북적거리는 사람들.

설빔이라 해봤자 새 운동화 한 켤레 받아 신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떼를 써서 얻어먹은 어묵 한 조각과 따끈한 국물은 잊을 수 없는 유년시절의 달콤한 추억이다.

그러나 설대목 장터에 얽힌 그러한 기억의 편린들은 빛바랜 사진첩처럼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설을 앞둔 단대목의 재래시장은 그리운 옛풍경을 아직도 조금이나마 간직하고 있다. '개미 쳇바퀴 같은 나날'이 불만스럽다면 한번쯤 설 단대목의 재래시장을 찾아보면 어떨까.

5일 대구 서문시장. 설대목을 맞아 오랜만에 활기를 띠는듯 했다. 10개 상가지구 7천여 점포가 밀집한 서문시장은 곳곳에서 상인들과 손님들간 밀고 당기는 가격흥정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푼이라도 깎으려는 손님들이나 밑진다며 엄살을 떠는 상인들간 입씨름에도 모처럼 여유와 웃음이 오가고 있었다.

시장 주차장 맞은 편의 건어물점. 오징어, 북어포, 문어, 가오리, 대구포, 홍합 등 제수용품을 사러온 사람들로 유난히 북적거린다. 노점을 하는 40대 가량의 한 아낙이 장사가 안되는지 "우찌할꺼나, 우찌할꺼나, 이렇게 안팔려서…"하며 노랫말처럼 사설을 늘어놓는다.

일부 건어물점은 재래시장 답지않게 품목별 코너를 설치하고 계산대를 설치, 슈퍼마켓처럼 꾸미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 점포들은 예전 그대로 건어물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널려있지만 손님들이 찾는 것을 이곳저곳에서 용케도 찾아낸다.

이곳에서 20년간 장사를 해왔다는 김찬영(51)씨는 "예전엔 건어물이 제수용품 외에 도시락 반찬으로도 많이 팔렸지만 학교급식이 시작된 이후 매출이 뚝 떨어져 상인들마다 고생이 이만저만 아닙니더"라고 말했다. 도매시장이라 새벽 3시부터 문을 열지만 재래시장의 경기침체로 이제는 도매기능도 30% 가량 밖에 되지 않는다고 귀띔했다.

건어물 뒤편 참기름점들이 모인 상가. 본업인 기름장사는 뒷전으로 미룬채 강정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제2 지구 인근의 한 기름집은 아크릴 간판의 글자들이 세월의 부침(浮沈)으로 떨어져 나가거나 퇴색해버려 상호(商號)가 ㅇ과 ㄹ 등 자모 몇자만이 남아있다. 이 점포 여주인에게 장사가 잘되느냐고 물어보니 "장사가 안돼서 참기름 대신 강정 파는 것 아입니꺼"라며 되묻는다.

그래도 점포마다 아르바이트생을 2, 3명씩 고용, 숨돌릴 짬도 없이 강정을 계속 만들어내는 분주함이 단대목 시장의 정취를 더해준다. 강정가게들이 밀집한 한복판쯤엔 '뻥튀기' 기계들이 가스불을 받으며 한창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튀밥이 이러저리 흩어진 '뻥튀기' 기계 주변에 웬 비둘기 한 마리가 눈에 띈다. 가만보니 튀밥 주어먹는데만 정신이 팔려 사람이 다가가도 달아날 생각도 않고 '펑!' '펑!'소리에 놀라지도 않는다. 뻥튀기 기계의 단골손님(?)인듯 기계주변의 검댕을 잔뜩 묻힌 깃털이 비둘기가 아니라 까마귀 몰골이 돼버렸다.

이윽고 '펑!'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튀밥들이 구름처럼 쇠그물망에 가득찼다. 익숙한 솜씨로 뻥튀기 기계를 돌리는 40대 남자는 "은근한 불로 5분 가량 고루고루 데워줘야 합니더. 찹쌀이 너무 들어가면 찰떡처럼 흐물흐물해지므로 재료배합을 잘해야지예"라며 요령을 일러준다.

설 분위기는 한복점에서 한층 더 무르익어간다. 예닐곱살 됨직한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주부들이 때때옷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입혀보기도 한다. 개량한복보다는 전통한복이 잘 팔리지만 금박을 입힌 것 보다는 현대적 디자인을 선호하는 편이라고 한복점 주인들은 말했다.

시장통 소방도로 좌우에 길게 늘어선 노점상에게도 설대목은 1년중 가장 분주한 때. 사과와 배, 딸기 등을 목판에 올려놓고 오가는 손님들을 불러들인다. 허리춤에 묶은 묵직한 전대에서 때묻은 지폐를 꺼내 침을 묻혀 셈하는 모습에서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우리를 에워싼 천박한 교만과 나태함, 허영이 초라해지기조차 한다. 북적거리던 장터의 뜨락에도 어둠이 밀려오고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갈때 쯤이면 노점상들은 '떠리미(떨이)요, 떠리미!'를 외치며 고된 하루를 마감할 준비를 한다.

류승완기자 ryusw@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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