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시인 구상 선생

입력 2002-02-07 14:16:00

관수세심(觀水洗心). '물을 바라보며 마음을 닦는' 노시인의 시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왜관 낙동강변에서 살 때도 그랬지만 지금 거주하고 있는 서울 한강 근처 아파트의 거실 당호 또한 관수재(觀水齋)가 아닌가.만 여든둘의 고령으로 건강이 악화돼 두문불출하고 있지만 시인은 문단의 거목답게 흔들림이 없는 모습이다.

부인과 두 아들마저 먼저 보내고서도 그가 꼿꼿한 노년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신앙과 문학정신의 힘'이라는게 주변의 얘기다."왜관과의 인연이 참으로 묘해요. 내 친정같은 곳이거든…".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함경도에서 자랐지만 본적이 왜관이다.해방후 월남했다가 한국전쟁 때 피난와서는 왜관에 정착했던 것.

자신의 신앙에 따라 성베네딕도 수도원이 있던 왜관에 자리를 잡았고 의사였던 부인이 이곳에 성심병원을 개원했으며, 해방후 형과 함께 북한 정권에 억류됐던 독일인 신부로부터 유일한 가족사진을 입수한 곳도 바로 왜관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왜관에서 대구를 오가며 대학에 문학강연을 했고 지역 언론계에 몸담기도 했다. 대구의 원로 문인들이 그를'향촌동의 백작'으로 기억한다. 그의 문학적 역량과 호방한 성품이 그만큼 대구의 문단을 기름지게 했다.

시인은 스스로도 "역사의식이 강했던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일제때의 사회주의 심취와 해방후 공산당에의 항거,한국전쟁 종군, 전후 반독재 투쟁의 여정이 그 증거이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에 의해 옥고를 치르면서 오로지 문학의 길만을 묵묵히 걷겠다는 결심을 했고, 그 다짐은 평생 흔들리지 않았다.

"개관식에는 꼭 참석하고 싶어요". 노시인은 어려운 왜관행을 결심하고 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낙동강변의 관수재행. 그것은 마음도 육신도 아닌 허무의 실유(實有)로 흐르는 강 같은 시세계, 혹은 시원의 이상향으로의 회귀욕구일지도 모를 일이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