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씨 지핀 문화유적지 보존 100만 서명운동

입력 2002-02-04 14:09:00

독립운동가 이상정 장군의 고택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90번지 계산성당 바로 뒤편이다. 오랜 세월 잊혀졌던 독립운동가의 옛집을 처음으로 공식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상화 시인의 고택이 그랬고 서상돈 선생의 고가가 그랬듯, 계산주차장과 계산문화원사이에 있는 이들 유서깊은 공간은 후손과 지역민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의 무관심속에 방치, 표지석조차 하나없다. 상화의 맏형인 이상정 장군은일제때 만주에서 민족교육과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한 애국지사였다.

해방이 되고도 재중 교포들의 귀환을 돕다가 뒤늦게귀국, 뇌출혈로 불과 3개월만에 아쉽게 타계한 이 장군의 고택은 'ㄱ'자로 당당하게 서 있다. 비록 골목길이 막히긴 했어도 남서쪽으로 불과 30m 가량 떨어진 곳에 국채보상운동의 주역이었던 서상돈 선생의 고가(88번지 )가 있고, 그 한집 건너가 바로 상화 시인의 고택(84번지), 그 옆옆집이 옛 청구대학 설립자의 집, 그리고 그 앞의 산부인과 자리가 한솔 선생이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집이다.

이 일대를 민족사적인 문화유적지로 보존해야 한다는 100만 시민 서명운동에 이 이상의 다른 명분이 또 필요할까. 막 불붙은 서명운동은 시민단체와 문화예술단체 등의 가두홍보와 함께 고조될 것이고 뜻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여기에 동참할 것이다.가옥 소유주들도 사사로운 이익에만 집착하지 않고 있다. 실제 상화고택의 소유주는 상화 선생이 운명한 바로 그집이라는것을 알고는 생활의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집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해오고 있다.

그러나 대구시와 중구청의 역사적인 공간 보존대책은 불투명하다. 비록 상화의 고택 보존을 위한 복안이었고 기념관 건립사업과 연계한 변경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일제 때 그어놓은 도시계획선이 지금껏 없어지지 않았던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심지어는 도시계획선이그어져야 상화고택을 보존할 수 있다는 안일한 발상은 '손안대고 코풀기'에 다름 아니라는 비판마저 일고 있다.

대구시는 4년전 이곳에 상화기념관 건립사업을 추진하다 상화의 고택 구입이 여의치 않자 예산을 모두 반납해 버렸다. 감정가액과 고택 소유주가 요구하는 집값 차이 때문에 사업을 포기했다는 변명을 어느 시민이 수긍할 수 있을까. 당시 계획은또 고작 상화 고택 보존과 기념관 건립을 위해 인근 고가들을 헐어 주차장과 편의시설을 조성한다는 발상이었다.

그런데 상화고택을 보존하기 위해서 이 일대의 역사공간을 헐어서 주차장과 진입도로로 만든다는 어이없는 계획도 마다하지 않고있다. 올해 대구시가 상화고택 일대를 매입하기 위해서 세운 예산은 한푼도 없다. 게다가 추경 예산요구나 국비요청도 쉬운 일이 아니다.

경주시는 김동리와 박목월 문학기념관 건립에 수십억원을 보탤 예정이다. 영양군은 이문열의 고향에 세운 광산문학연구소에 4억원을 지원했다. 칠곡군은 구상문학관 건립에 13억원을 세웠다. 인구 250만 대구에서 우리 근대문학의 발상지요 구국 항일운동의 시원지였던 이곳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문학기념관 하나 세우지 못한다면 대구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숱한 문인묵객들이 망국의 울분을 문학과 예술로 승화시켰던 유서깊은 공간, 조국광복의 열망을 안은채 밤새워 문학담론을 꽃피웠던 선각자들의 고택을 세월의 풍화 속에 내버려 둔 채 우리는 이땅에 과연 '봄이 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워서는 안 될 문화적 자취와 역사의 현장을 콘크리트 더미에 매몰시켜 놓고 대구를 '문화도시'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