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대구 팔공산엔 하얀 눈이 소담스럽게 내렸다. 그 하얀 눈을 고스란히 이고 있는 소나무, 단풍나무 숲에선 코가 아릴 정도로 상큼한 바람이 윙윙 거린다. 한티재. 애초에 눈을 예상하고 나선 길은 아니었을텐데, 사람들은 고갯마루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재를 넘자 언젠가 많이 본 듯한 하얀 동구밖 풍경, 투명한 겨울 하늘도 한 몫 거들며 뽐내고 있었다.
대구에서 군위 인각사쪽으로 행보를 잡는다면 반나절 여행으로도 겨울 서정에 어울릴만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한티재를 넘어 10여분 달리면 군위 삼존석굴. 하지만 길가 표지판에는 삼존석굴이라는 안내는 없다.
'제2석굴암'이 있을 뿐이다. 석굴암에 버금간다는 자부심. 사실 이 돌부처는 경주 석굴암보다 먼저 만들어졌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눈 덮어 쓴 석굴, 아랫마당에서 멀찍이 올려다 봐야 한다. 돌담장이 정겹기만한 한밤마을 역시 골기와집마다 수북이 쌓인 눈이 고풍스런 겨울운치를더해준다.
부계삼거리에서 우회전, 영천 신녕(985번 지방도)으로 간 다음 의성방면 28번 국도를 타고 갑령재를 넘어가면 군위 화수면. 화수정류장에서 우회전하여 고로방면(908번 지방도)으로 2.5㎞쯤 달리면 인각사다. 갑령재의 구불구불 이어지는 오르막 내리막 길.응달엔 아직 반짝이는 빙판이 운전자를 긴장시킨다.
인각사(麟角寺.군위군 고로면 화북리)는 바로 길가에 붙어 있다. 그러면서도 외진 느낌이 먼저다. 작으면서 일주문도물론 없다. 사찰 주변에 그 흔한 식당도 없다. 울도 담도 없다. 극락전 앞마당에 석탑, 석등, 부도가 나란히 서 있을 뿐이다.정돈된 느낌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 같다.
천년고찰의 흔적을 더듬어 보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한다.마침 내린 눈이 절 규모를 약간 더 크게 비쳐줄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발길이 북적이는 다른 사찰과 달리 한적한분위기가 마음에 여유로움을 듬뿍 얹어준다.
인각사를 둘러싸고 있는 화산(828m). 군위군과 영천시의 경계지점이다. 화산의 화려하고 기품있는 모습이 마치 상상의 동물기린을 닮았으며 절이 들어선 자리가 기린의 뿔에 해당되는 지점이라 하여 인각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인각사쪽으로 향하다 보면 우뚝 솟은 봉우리 하나가 시야에 계속 들어 오는데 마을 주민들이 옥녀봉이라고 일러준다. 절 바로 앞에는 수많은 학들이 살았다는 학소대가 있고 조금 위로 올라가면 수정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 수달이 살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다는 군위의 젖줄 위천이 시작되는 곳이다.
잠시 '속도의 시대'를 접고 경내를 천천히 둘러 본다. 이 절은 언제 생긴 걸까. 이 절에는 누가 있었을까. 이 절이 우리에게 남긴 이야기는 무엇일까. 옛 모습을 잃기 전 절터는 얼마나 우람했을까. 애써 추측해봐도 알길이 없다. 인적 끊긴 사찰에서의 이런 저런 생각은 못내 허전함으로 변한다.
극락전 오른쪽 마당에 지대석까지 온통 드러내 놓고 서있는 비가 일연(一然.1206~1289)스님의 부도이다. 일연이 누구인가. 고려시대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함께 우리 고대사의 상당부분을 살려낸 삼국유사의 저자 아닌가.
수많은 신화.설화.전설을 집대성, 삼국사기의 누락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는 정보의 보물창고. 일연은 이곳인각사에서 만년을 보내며 삼국유사를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삼국유사의 산실'인 셈인데….깨어지고 뭉툭해진 보각국사 부도비도 글자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옛날 과거 보는 선비들이 이 비의 글자를 깎아내 갈아마시면 반드시 급제한다는 소문때문에 부도비가 심하게 훼손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고려국사의 부도비치고는 너무나 초라하다. 흔적만 남아 있는 셈이다.
"이리 오시지요". 먼발치의 주지스님(석상인.釋常仁)이 물끄러미 바라보다 먼저 부른다. 대뜸 저녁공양부터 권한다.인적이 드문 데다 제법 늦은 시간이라 그냥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심산이리라. 풍광 수려하고 화려한 절집에 익숙해진 눈에는 어찌보면 황량한 기운마저 감돈다.
그러나 이곳에서 삼국유사가 탄생한 사실을 짚어보면 이 겨울이 끝나기전, 눈이 다 녹기전 한번쯤 이곳 산사를 찾아 삼국유사 집필에 몰입하던 일연 스님의 분위기에 젖어보는것도 또한 의미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글.사진:노진규기자 jgroh@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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