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남산위 저 소나무처럼...

입력 2002-01-24 15:38:00

어느 교수가 관찰한 바로는 서울 남산에 자생하는 소나무는 요즘 생장을 멈추고 대신 주먹같은 솔방울만 주렁주렁 지나치게 많이 달고 있다한다.이 교수의 설명으로는 각종 공해에 찌들리다 못한 소나무가 자신의 생육을 아예 포기한 채 오로지 종족의 번식 수단인 솔방울만 한개라도 더 퍼뜨리려고 안간힘이란 것이다.

이처럼 주변 환경이 좋지 않을수록 후세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경우가 자연계에서는 허다하다는 것이고 보면 그 결연한 자기 희생에 숙연해진다. 결국 현실의 삶이 어려울수록 다음 세대를 위해 내 한몸 던지는 게 자연의이치요 하늘의 뜻 아닌가 싶은 것이다.

◈실패한 정치실험 '지도자 공황기'

그러고보면 요즘의 우리 정치 그리고 정치인의 행태는 갈수록 기가 막힌다. IMF의 혹독한 시련기에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국가에 봉사는 못할망정 각종 비리에 연루되거나, 아니면 백성의 피 같은 공적자금을 흥청망청하다 줄줄이 묶여 들어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차라리 남산위의 한 그루 소나무보기가 부끄럽다는 마음이 된다. 이러고서야 이 나라에 미래가 과연 있을까.

지난 14일 김대중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은 어찌보면 DJ식 '정치실험'이 참담하게 패배했음을 스스로 선언하는 자리 같았다.노대통령이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연일 사건이 터지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는 말을 했을때, 아 이 어른이 자신의 개혁 실험을 더 이상 밀고 나갈 힘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구나 하는 느낌마저 받았던 것이다. DJ가 누구인가. 40년이 넘는 정치 생애동안 단 한번도 힘없다, 잘못했다는 식의 나약한 소리를 입밖에 내본적 없는 그이다.

97년 대선 후보로서 관훈토론회에 나섰을때 패널리스트로부터 "은퇴선언을 하고도 출마한 것은 거짓말한 것 아니냐"는질문을 받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적은 있지만 거짓말 한 적은 없다"고 강변하면서까지 기어이 권좌에 오른 DJ다.그런 그가 기진맥진한 것을 보면서 무턱댄 '정치실험'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다시한번 깨닫게 된다.

지나놓고 보니 DJ의 치세(治世) 4년간은 개혁을 하라, 세금을 더 내라는 등 요구만 있었지 다스리는 자의 자기희생과 베풀음(施惠)은 아예 눈씻고도 볼수 없었던 것만 같다. 그게 바로 DJ 치세가 실패로 끝나는 근본 원인이 아닌가한다. 가혹한 IMF시절인만큼 세금 더 내야하고 또 개혁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치를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다만 남에게 개혁을 요구하려면 스스로가 깨끗해야 하고 세금을 많이 거두어들였으면 그 만큼 효율적으로 사용됐어야 옳았다는 말이다.그런데 줄줄이 부패된 모습으로 피 같은 공적자금을 흥청망청 쓰면서도 누가 문제점이라도 지적하면 반(反)개혁세력으로 몰아붙이고 제 몫 챙기기에만 급급했으니 어느 백성인들 등을 돌리지 않겠는가.

◈'자기희생' 지도자의 소중한 덕목

요즘 우리는 심각한 지도력 부재(不在)현상을 겪고 있다고 보는게 옳다. 이 나라 근대화의 주축이던 개발연대 인물들이 소임을 다하고 물러났고 다음으로 등장한 민주화 세력과 개혁세력들은 만신창이가 돼 추락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 나라를 주도해온 세력들이 맥을 못추고 새로운 세력은 등장하지 않았으니 지금이야말로 '지도자 공황기'라고 보아 마땅한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지금 DJ의 실패를 헐뜯기만할게 아니라 오히려 그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참신한 국정주도 세력을 길러내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시급하다고 본다.

요즘 사람에 따라서는 CEO대통령을 중심으로한 양심적인 전문가그룹이 디지털 한국을 끌고 나가야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개발연대에서부터 개혁세력에이르기까지 갖가지 정치실험에 실패한 처지에 CEO대통령을 앞세운 전문가 그룹의 등장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마지막 비장의 카드인 것만 같아 솔깃해진다.

그러나 새 시대의 지도자라면 이 모든 것에 앞서 무엇보다도 '남산위 저 소나무'같은 결연한 자기 희생의 정신부터 갖춰야할 것이다. 이에 덧붙여 '하늘의 그물은 넓고 성글지만 죄 지은 사람은 결코 빠뜨리지 않는다(天網恢恢疏而不漏)'는 옛 말씀을 항상 염두에 두고 근신하는 그런 지도자라면 금상첨화 아닐는지.하도 신뢰할만한 지도자가 아쉬워 객적게 해보는 소리다.

김찬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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