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나무를 꿈꾸며

입력 2002-01-12 14:28:00

아침 바람이 매섭다. 온몸으로 겨울 바람을 맞으며 눈이 시리도록 칼칼한 하늘을 쳐다본다. 아! 하늘, 입 속으로 하늘, 하늘하고 불러본다. 하늘이 내 가슴 안으로 명징하게 들어와 앉는다. 몸도 마음도 하늘로 푸르러진다.

바람 한 줄기 지난다. 나뭇가지를 건드리며 지나가는 바람이 소리를 낸다. 춥지 않으냐고, 나 때문에 춥지 않으냐고, 언 땅을 지나 눈 밭을 지나, 매서울 대로 매서워진 날 선 손톱으로 맨살을 할퀴며 지나는 이 자리에 하필이면 네가 서 있어야 하느냐고.

◈꿈틀대는 생명을 키우는 나무

나무 아래 서 본다. 나무는 나보다 더 하늘 가까이에 있다. 나무는 내가 맞으며 보낸 겨울 바람보다 얼마나 더 모진 바람앞에 선 채로 몸을 내맡기며 발돋움했을까. 바람 속에 키운 나무의 키, 나보다 더 하늘 가까이 선 나무가 부럽다.

또 버리고 버리고 겨울을 살아내고 있는 나무 앞에. 껴입을 대로 껴입고 그래도 추운 내가 부끄럽기만 하다.

정말 부끄러워 해야 할 것들을 부끄러워 할 줄 모르고, 부끄럽지 않은 것들로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며 산 때가 있었지. 더 가지지 못해 부끄러웠고,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인 것이 부끄러웠고, 더 그럴 듯하지 못해 부끄러웠고, 남들보다 더 작은 것이, 화려하거나 찬란하지 못해, 남들 보다 더 잘나지 못해 부끄러웠고, 부끄러웠지.

나무도 부끄러웠을까? 지난 봄에도 부끄러웠을까. 더 반짝이고 앙증맞은 잎과 꽃을 피우지 못했다고 지난 여름에도 부끄러웠을까? 화려하고 무성한 잎들로 치장하지 못했다고 지난 가을에도 부끄러웠을까? 더 탐스럽고 보기 좋은 열매를 달지 못해, 더 아름답고 고운 물이 들지 않아 부끄러웠을까.

나무는 지금 죽고 싶도록 부끄러울까? 아무것도, 자랑스레 가지고 있던 것 아무것도 없는데? 반짝이던 잎새도 다 사라져 버리고 온 힘을 다해 만들었던 열매도 모두 잃어버리고, 맨살 다 내어 놓은 채 칼날같은 바람에 춥고, 배고프고, 외롭고, 힘들고, 아프기만 할 텐데.제 추위와 바람과 싸우느라 아무도 바라봐 주지도 않는데.

나무는 지금 부끄러울까?

있는 그대로 견디고 있는 일에, 견디며 살아 있는 일이.

다시 나무를 쳐다본다. 나뭇가지마다 볼록볼록 잎눈과 꽃눈이 맺혀있다. 아 그래. 나무는 부끄럽지도 불쌍하지도 않았구나. 그래 바로 그것이었구나. 보이는 게 아니라 살고 있었구나 살아 있었구나. 두꺼운 껍질 속에서 말없이 입 다물고 눈 감고 서서 죽은 듯 보이면서 뜨겁게 목숨을 꿈으로 키우고 있구나.

겨울은 꿈꾸는 나무의 계절인 것 같다. 봄은 봄을 위한 나무의 목숨이, 여름은 여름을 위한 나무의 목숨이, 가을은 가을을 위한 나무의 목숨이 제 때를 사는 것이듯 겨울은 겨울을 위한 나무의 목숨이 살아내는 계절인 것 같다.

마른 껍질 속에서 꿈틀대는 생명을 키우고 또 키우는 나무, 그래서 겨울 나무는 놀랍고도 신비로운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겨울 나무가 되고 싶다

빈 나뭇가지 사이로 작은 새 두어마리 포르륵 포르륵 꽁지를 까불거리며 옮겨다니고 있다. 짜륵짜륵 작은 소리로 노래 부르고 있다. 꿈꾸는 잎들과 꽃들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고 있는 게 분명하다. 맞아! 새는 고운 소리로 노래부르는 게 노래이지. 새가 마음으로만 노래 부른다면 들을 수 없지. 노래라고 할 수 없지. 내 마음에 숨은 사랑도 노래 불러야 사랑이지.

나의 속 어딘가에 숨어 있던 사랑이 꼼지락거리는 몸짓이 느껴진다. 내 뱃속에서 느껴지던 태동처럼 경이로운 움직임, 사랑노래가 흘러나오려나 보다. 살갗 속의 작은 실핏줄들이 서로에게 길을 열어 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작디 작은 핏줄들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잠시 겨울 아침, 겨울 나무 아래서 나도 사랑을 노래하고픈 나무가 되는가.

정재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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