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읍 석평1리 선돌(入石)마을은 거미가 줄을 쳐 마을을 감고 있는 형상을 한 안동 권씨 검교공파 집성촌이다.
이 마을에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홍패를 받을 때에 쓰던 관의 형상을 한 복두바위, 문과 급제자가 쓰던 형상의 사모바위, 감사나 수령들이 부임할 때 받던 의장 형상의 일산바위(조개암) 등 선돌이라는 지명에 걸맞게 기묘한 바위형상들이 동리의 내력을 말해주고 있다.
이곳 안동권씨 입향조는 도곡 권균의 6대손인 권상중으로 1624년(인조2년)에 이산면 이르실에서 태어나 봉화 우구치로 잠시 옮겨 살다 동산골로 나오면서 지금의 선돌을 개척했다.
이 마을 유학의 거봉으로 추앙받는 선암 권명신(1706∼1786)선생은 입향조의 증손으로 과거에 뜻을 두지않은 채 마을에 서당을 열어 제자백가와 경세제민의 학문에 전념하고 후진양성에 일생을 바쳤다.
선생은 1784년(정조8년) 나라의 폐단과 시정책을 상소했는데 그 내용이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 지적한 바와 상통하나 30여년을 앞서 이루어져 주목 받아 왔다.
선돌마을에는 선대가 선암 선생에게 살림집으로 지어 내려준 송석헌(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5호)이 남아 있다. 송석헌은 경사진 지반을 이용하여 정침채를 세웠다.
경사가 심한 탓에 전면에 기단을 높게 조성하여 정침 우측으로 사랑을 펼쳤다.이 사랑과 접하여 계단을 달아 영풍루와 연결시키고 있는 이 건물양식은 일반 상류주택에서 찾아 보기 드문 예로 영남지방 사대부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어 고건축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방문이 잇따른다.
이 마을 출신 유학자로는 권사설(1739∼1815), 권사주(1704∼1804), 권사직(1735∼1819), 권약규(1776∼1855), 권교준(1803∼1864) 등이 있다.
특히 귀암 권용형은 부모 생존시는 물론 거상중에 무덤옆에서 움막을 짓고 6년 동안 시묘을 마다하지 않는 등 효행으로 유명했다. 당시 유림에서 상소해 나라에서 상을 내리려 해도 마다하고 강원도, 충청도로 옮겨 다녀 삼도에서 모두 효자추천을 한 일화로 명성이 높다.
귀암의 후손이자 현재 이마을에 살아있는 효자로 존경받는 권헌조(74)옹. 몸이 불편했던 부모님을 위해 15년 동안 손수 밥을 지어 봉양하고 부모 상을 당했을 때 6년 동안 상복을 입고 생활했던 그도 "조부와 선고에 비하면 자신은 부끄럽다"고 말할 정도다.
선돌에는 입향조인 권상중이 명사거유들과 고유하기 위해 건립한 광림대, 석류정과 이유정 삼로당 등이 있었으나 세월속에 묻혀 이제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100여년전 130여가구에 달했으나 이제는 40여 가구 정도다. 이 마을의 역사를 대변하는 동암서당과 송석헌 선암재 동산정사 등이 고적과 함께 효를 전승하는 전통마을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봉화.김진만기자 fact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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