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도자기 어제와 오늘(1)-청자의 고향 용천

입력 2002-01-04 14:00:00

중국 도자기는 전통적으로 남쪽에는 청자, 북쪽은 백자가 발달했다. 이를 두고 중국 도예계는 남청북백(南靑北白)이라 일컫는다.

그 남청(南靑)의 연원에 거슬러 올라가면 정점에서 필연적으로 '월요(越窯)청자'를 맞닥뜨리게 된다. 바로 이 월요가 '천하 비색(翡色)' 세계적 명품 고려청자의 모태인 것이다.

월요 유적지는 저장성(浙江省) 일대, 우리나라 남한면적만큼이나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이들 월요 유적지들은 이미 당대(唐代)부터 수백기(基)의 가마에서 원시청자라 불리는 푸른빛의 그릇들을 구워냈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이들 월요청자 기법이 황해를 건너 한반도 서해안으로 전파되어 세계적 명품 고려청자로 꽃피우게 되었다. 반면, 중국에서는 북송시대 월요청자의 기술력이 결집되어 '설랍동(雪拉同)'이란 이름의 '용천(龍泉)청자'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때문에 용천청자와 고려청자는 월요라는 한 배에 잉태되어 형제지간과 같은 관계인 것이다.

용천은 저장성과 푸젠성, 장시성이 맞닿는 삼각점에 자기토(磁器土)가 풍부하고 수목이 울창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또한 그 곳은 수량이 풍부한 '구강(歐江)' 상류에 자리잡고 있어 도업(陶業)이 발달할 수 있는 요건을 충분히 갖추었다.

저장성 남쪽 끄트머리 진화(金華)에서 열차에 내려 갈아탄 버스는 줄곧 구강을 끼고 돌다가, 때로는 천길 낭떠러지 절벽위를 거미줄 타 듯 달린다.

황해와 맞닿는 원저우(溫州)에서부터 출발해 버스와 나란히 달리는 구강은 나룻배가 유유히 떠다녀 한폭의 실경산수화를 그려낸다. 이미 1천년 전에는 저 강에 용천청자를 실은 범선들이 분주하게 오르내렸으리라….

고려청자와 한 뿌리에서 난 용천청자의 갖가지 상상에 시달리며 금화에서 4시간여를 달렸을 때 용천이 어둠속에 윤곽을 드러낸다.

삼륜자전거를 타고 터미널에서 호텔로 가는 동안 길가는 청자를 파는 가게보다 칼을 파는 가게가 더 많이 눈에 띈다. 바로 이 곳이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는 명검 '용천보검(龍泉寶劍)'의 고장이란다.

용천은 중국 청자의 최대 도요지가 있고 그 기술이 전수되어 왔기 때문에 2년전까지만해도 외국인 출입이 통제되던 곳이다. 때문에 아직 외국인을 낮선 눈으로 보며, 호텔에서 마주치는 공안(公安)의 눈초리는 싸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조그만 산골 도시, 이 곳에서 만들어진 용천자기는 북송~남송시대(960~1127년)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남송때 사람 장성이(張生一), 성얼(生二)형제의 가마중 형요(哥窯)는 중국 5대관요(官窯)의 하나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명대(明代)에는 지름이 2척(尺)되는 접시를 만들었으나 청대(淸代) 들면서 경덕진 자기에 밀려 강희제(康熙帝) 이후 생산을 중단하게 됐다. 용천자기가 현대들어 다시 명맥을 잇게 된 것은 1957년부터다.

저우언라이(周恩來)총리가 중국5대관요를 복원하라는 지시를 내림으로써, 당대 최고의 도예가, 사학자, 교수 등 10명이 연구한 끝에 새로 가마에 불을 지필 수 있었다.

'용천청자회복위원회'가 결성되어 중국예술학원 덩바이(鄧白)교수가 복원작업에 착수했을 때 같이 참여한 도예가가 쉬차오싱(徐朝興)씨인데 우리는 그를 먼저 만나 보기로 했다.

전국인민대표이자 '5.1노동장' 칭호를 받은 쉬차오싱씨의 '조흥청자원'은 주변의 여느집과는 달리 널찍한 정원에 서양풍의 고급스런 집이다. 전시관과 살림집을 겸한 건물을 마주보고는 깨끗한 2층 작업장 건물이 들어서 있다. 마당을 들어서며 안내인에게 도착을 알리자, 작달막한 키에 반백의 쉬차오싱씨가 쫓아나와 반갑게 맞는다.

1943년생인 쉬차오싱씨는 56년 도예계에 입문하여 지금까지 용천청자의 독특한 세계를 재현하는데만 매달렸다. 용천청자 외길을 걸어온 만큼 그의 작품세계는 무척 다양하다.

접시에서부터 발(鉢), 화병(花甁), 다구(茶具) 심지어 청자피리에 이르기까지 생활용기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 특히 송대의 부장품인 '오관병(五管甁)'과 '용천반점(斑點)'청자도 완벽한 형태로 재현해 놓았다.

뿐만아니라 그만의 비법으로 두종류의 유약을 동시에 칠해 서로 다른 빙렬을 표현해낸 작품과, 그릇 표면 구멍을 뚫어 유약을 엷게 칠해 구운 청자 전등갓 등은 일품이다.

그러나 언뜻봐도 색감에 있어서는, 고려청자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영롱한 비색과는 확연히 다르다. 용천청자는 그 푸른색이 마치 잔잔한 흰 솜털을 머금은 매실의 어린 열매색과 같다고 해서 '매자청(梅子靑)'으로 부르는데 이는 고려청자 색감에 비해 훨씬 부드러우며 밝은 청색을 띤다. 때문에 매자청을 내기위해서는 유약을 최대한 얇게 칠한다고 한다.

전시관을 둘러보며 하나하나 설명을 곁들이던 쉬차오싱씨는 진열장 위에 깨어진 청자 주전자를 집어든다.

지난해 8월 아들과 함께 전남 강진군에서 개최한 '한중일 청자 학술세미나'에 참가했는데 그때 받은 선물을 집에 와서 풀어보니 깨어져있어 안타깝다고 했다.

한국서 건너온 청자란 말에 자세히 들여다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치졸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 불에 굽다만 듯한 유약 기포, 누르스레한 색감, 한마디로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과연 중국 최고 도예가를 초청해놓고 줄 수 있는 선물이 이 정도일 수밖에 없다니….

작품 감상을 마치고 작업장을 둘러보면서 "청자토를 어떻게 조달하느냐"고 물으니, 쉬차오싱씨는 멀찍이 물레작업을 하던 아들, 쉬림(徐凌, 미술공예사)에게 차를 운전해 도석(陶石) 가공소로 안내해줄 것을 이른다.

전충진기자 cjjeo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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