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후 안동 병산서원 앞에서 고인을 떠나 보내고 돌아서는 발걸음은 무척 무거웠습니다. 50대 중반 한창 일할 나이의 선배를 잃었다는 슬픔 때문인지, 그가 일궈놓은 대구현대미술이란 터전을 남은 우리들이 끌고 가야하는 책임감 때문인지….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바람을 막아주는 큰 버팀목이 빠져 나간 것처럼 대구미술계, 나아가 한국미술계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인은 70년대에는 작가로, 80년대에는 화랑 운영자로 대구미술을 한단계 끌어올린 공적을 남겼습니다.수화랑 댓갤러리 인공갤러리를 맡아 젊은 작가를 찾아내고 큰 규모의 전시회를 열던 그 당시가 눈앞에 생생합니다.
고인이 대학 실기실과 화실을 돌며 발굴한 젊은 작가들이 현재 지역미술계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것만 봐도, 그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고인은 대구에서 처음으로 화랑을 현대적으로 운영한 이로 기억됩니다.
대관 전시에 의존하던 화랑의 위상을 청년작가와 외국작가의 비구상 기획전을 과감하게 유치하는 형태로 바꿔놓았습니다.
80년대 초반 후배들과 시립도서관 부근 허름한 방에 모여 외국 미술관련 서적을 뒤져가며 밤새워 토론하고 공부하던 때를 잊지 못합니다. 고인은 젊은 작가들에게 논리적 토대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그 자신도 불철주야 노력했습니다.
서울과 대구에서 인공갤러리를 운영하던 80년대 후반 미국 미니멀아트의 대가 '도날드 저드전' 등 획기적인 기획전을 통해 서울 화랑가에도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을 보면서 대구미술인으로서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90년대 중반이후 화랑 문을 닫았던 그가 대전에서 비비갤러리를 오픈, 개관전으로 '윤형근전'을 열었던 것이 불과 몇달전입니다.활동을 재개하려는 시점에 병마를 이겨내지 못했다는 것이 무엇보다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그는 진정으로 미술을 사랑한 사람이었고, 미술을 통해 인생을 보냈으며 자신의 족적을 이곳에 남겨놓았습니다.그의 열정과 노력은 우리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교준〈미술가〉
고 황현욱씨는 1947년 안동 태생으로 서라벌 예대를 졸업하고 70년대초 대구에 내려와 작품활동을 했다. 80년대 초반부터 수화랑 댓갤러리 인공갤러리 등을 맡아 현대미술 활성화에 힘썼고, 이교준 권오봉 남춘모 등의 작가를 발굴했다. 상업성과 타협하지 않고 '형상이 없는 비구상작품'을 선호한 화랑경영자였다. 24일 간암으로 서울대 병원에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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