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팔공산엘 갔다. 단풍놀이 갈 형편은 아니어서 드라이브로나마 가을산 근처를 기웃거리고 싶어서였다. 파계사 앞에서 동화사쪽으로 돌아드니 아하, 만산홍엽(滿山紅葉)이었다. 나무란 나무는 저마다의 색깔들로 불타고 있었다. 단풍목들은 아가손 같은 잎들을 빨갛게 물들이며 노래하듯 팔랑거렸고, 봄날의 분홍 꽃구름도 모자라 가을단풍마저 일품인 벚나무, 샛노란 꽃비를 떨구는 은행나무들이 길손들의 눈을 잡아끌었다. 산아래 고찰 부인사(符仁寺)에선 오래된 왕벚나무가 옥빛 하늘에 붉은 물감을 풀고 있었다.
지구 곳곳에서 전쟁의 포성과 피비린내가 그치지 않는데 자연은 묵묵히 제 할 몫을 해내고 있었다. 도리깨 춤추듯 들까부는 인간들을 탓하지도 않고 넓은 가슴으로 보듬어주고 있었다.
미국 뉴욕의 월드 트레이드센터와 워싱턴의 펜타곤에 대한 동시다발 테러가 터진지도 두 달이 가깝다. 이제는 사라진 월드 트레이드센터 쌍둥이 빌딩. 사고 전 그곳에 가봤던 사람들은 어찌나 높은지 구름이 저만치 눈 아래로 흐르고 있더라고 말했다. 상상조차 안되는 그 마천루의 창틀에 매달려 울부짖던 사람들, 화염을 견디다 못해 그예 낙엽처럼 떨어지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
뉴욕에 사는 어떤 이는 테러소식에 황급히 망원경을 갖다댄 순간 두 남녀가 함께 손을 잡고 까마득한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에 충격받아 내리 며칠을 앓았노라고 했다. 국화꽃을 들고 찾아간 현장에선 잃어버린 가족과 연인의 이름을 부르며 헤매는 사람들, 촛불 앞에서 흐느끼는 사람들로 그 가슴저미는 비통함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죽음이 어디 그곳에서 뿐이며 슬픔이 그들만의 것일까만, 수 천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전대미문의 테러로 인해 순식간에 죽음의 낭떠러지로 떠밀려간 엄청난 사건이기에 두 달이 가까운 지금껏 그 놀람은 쉬 가시지 않는다. 이방인인 우리도 그러한데 미국인들은 오죽할까.
외신으로 전해오는 그곳 분위기는 무겁기만 하다. 우울증이 안개처럼 미국 전역을 뒤덮고 있고,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봐도 놀란다고 비행기 테러에 연이은 탄저균 테러의 충격으로 그네들은 이젠 흰색 가루만 봐도 기겁할만큼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두려움'이라는 박테리아가 세계 최강국 미국인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으니 그런 점에서 테러리스트들의 계획은 성공한 셈인가.
미국은 이달 17일부터 시작되는 이슬람 금식월인 라마단 기간에도 공습을 계속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탈레반 측도 아프가니스탄 국민이 한 사람도 남지 않을 때까지 싸우겠다며 맞불을 놓고 있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핵전쟁이 현실화될지 모른다는 공포감마저 지구촌을 스멀스멀 덮고 있다. 브레이크 없는 폭주차처럼 모두가 극단으로만 치닫고 있다.
오늘은 입동(立冬). 아프간의 겨울은 영하 수십도의 혹한이라는데··. 송아지 눈처럼 순하디 순한 그 땅 어린이들의 커다란 눈망울을 사진으로 보면서 그 아이들에게 닥칠 이 겨울이 부디 신(神)의 가호로 춥지 않기를, 배고프지 않기를, 그래서 살아남기를 기도한다.
정의의 이름으로 피를 부르는 우리 인간들의 짓거리에 환멸을 느끼며 눈을 드니 단풍숲은 어찌 그리 처연하게 아름다운가. 말 없는 저 자연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스승이 아닌가싶다.
절기는 이제 겨울의 길목으로 접어들고 있다. 어느 집 정갈한 뜨락에서 바람결에 실려오는 만추의 국향(菊香)이 부질없는 세상사로 시름에 잠긴 마음을 다독여준다. 문득 송대(宋代)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시 '술을 마시며(飮酒)'의 저 유명한 구절, '국화를 동녘 울 밑에서 따드니 유연히 보이는 남산(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그 시구가 새삼 가슴저리는 울림으로 와닿는다.
마음으로나마 향기로운 국화 한 송이를 미국과 아프간의 무고한 희생자들에게 바친다.
전경옥 특집기획부장 sirius@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국정원, 中 업체 매일신문 등 국내 언론사 도용 가짜 사이트 포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