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오후

입력 2001-11-05 16:44:00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 '목마와 숙녀'

동년배 시인 김수영은 박인환의 포즈를 경멸했다고 한다. 삶의 진실이나 근본적 사유보다는 유행과 멋에 일관하는 그를 진정한 시인으로 생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시도 그런 혐의에서 벗어나기 힘든 시이다.

하지만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고 했지만, 가끔씩은 외롭고 또 그 외로움이 통속적이지 않을 때가 있다. 인생은 가끔 가을 바람 속에서 빈 술병을 세어가면서 한없이 대취하고 싶은 때가 있는 것이다. 김용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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