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가을걷이 보람을 갈무리한 벼 타작 소리
길을 나서면 붉게 물든 단풍 못지 않게 누렇게 익어 가는 벼논의 황금들녘이 아름답다. 농가에서는 가을걷이로 일손이 점점 바빠진다. 벼를 베고 타작을 하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지만 '이밥에 고깃국'이 소원이던 시기에 벼를 거두어들이는 일은 농가의 보람이었다. 볏단을 묶는 팔뚝에는 힘이 부쩍 오르고 땀방울이 맺힌 얼굴에는 생기가 감돌았다.
그런데 요즘은 쌀이 흔해 빠져서 추수를 앞둔 농민들은 기운이 쭉 빠진다. 보리밥도 귀해서 양껏 못 먹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쌀밥을 두고도 예사로 "밥맛이야!" 한다. 밥 한 그릇 지을 쌀이 껌 한 통 값이고, 밥 한 그릇이 커피 반 잔 값도 못되니 모든 것을 값으로 따지는 요즘에 쌀이 천덕꾸러기가 될 만도 하다. 값싼 외국쌀이 마구 들어오는 탓이다. 농사를 지을수록 손해라며 아예 논을 묵히고 일손을 놓는 농민들도 늘어간다. 마침내 농민들이 쌀값 보장을 요구하며 쌀가마를 싣고 시청으로 돌진하다가 경찰과 맞서 몸싸움을 벌이는 사태까지 빚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던 시절 벼를 베어들이고 벼타작을 하던 농민들의 소리를 들어본다.에~에루 에~에루
몽땅 비어라 몽땅 비어
열두 포기를 몽땅 비어
깊은 디는 곁으루 가지말고
높은 데만 비여 가세
전북 옥구 사는 이창래 할아버지의 벼 베는 소리이다. 벼를 몽땅 베어가자고 하면서도 벼가 깊은 데는 곁에 가까이 가지말고 높은 데만 베어 가자고 한다. 깊은 곳은 벼가 제대로 자라지 못해서 키가 낮은 곳이다. 벼가 아직 제대로 여물지 않았으니 그냥 두고 다 자란 벼만 베자는 말이다. 몽땅 베어 가더라도 무턱대고 베지 않는 분별력이 드러난다.
하어~하 얼른
한 단 묶~는다
허~ 허~~
한 단을 묶었네
에~해~에~ 얼른 하더니
또 한단 이로다
강릉 사는 김병기 할아버지 소리이다. 벼베기 노래는 이처럼 단순하다. 앞에서는 '베어가자'는 말이 되풀이되었는데, 여기서는 '한 단을 묶었다'는 소리가 되풀이된다. 볏단을 묶는 만큼 벼 베는 일이 진전되고 벼의 수확량도 결정된다. 따라서 벼를 베는 일 못지 않게 볏단을 묶어내는 일이 곧 일을 추는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벼베기를 하기 전에 우리 어머니들은 웁쌀을 마련하기 위해 한두 단씩 벼를 베어 풋바심을 했다.
시렁시렁 홀태기야
운종정달베 귀가 엷어
배가 얇어서 잘 떨어지고
중실베 백베가 좋다마는
다마금이 더욱 좋네
조실역도 좋다마는
바람이 불면은 잘 떨어지네
한무지 나락은 귀가 적고
나락은 나도 쌀은 나쁘네
물고 밑에 물천어 잡어
풋콩 놓고 밥을 지어
부모님께 전해 드리세
전남 함평 사는 강영진 어른의 '가락홀태기 소리'이다. 가락으로 된 홀태로 벼를 훑으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보리누룸이 춘궁기이자 보리고개이듯이 벼가 익을 무렵이면 독에 쌀이 떨어지기 일쑤이다. 따라서 우선 어른들 밥상 위에 올릴 쌀을 마련하기 위해 아쉬운 대로 벼를 조금씩 베어와서 홀태로 훑는다. 대나무나 수수깡으로 집게를 만들어 벼이삭을 집게 사이에 넣고 벼 낟알을 훑어내는데, 함평에서는 이를 가락홀태질이라고 한다.
한 사람이 앞소리를 부르면, 여러 사람이 '시렁시렁 홀태기야' 하고 뒷소리를 받는다. 벼의 품종에 따라 귀가 엷은 것도 있고 바람이 불면 잘 떨어지는 것도 있으며 나락은 많이 나도 쌀은 품질이 나쁜 것도 있다. 운종정달벼, 중실벼, 다마금, 조실역, 한무지 나락 등은 모두 벼의 품종 이름이다. 벼를 훑으면서 벼 품종 공부를 하는 셈이다. 그럼, 물고 밑에 노는 물고기를 잡고 풋바심한 햅쌀에다 풋콩을 드문드문 놓아서 맛있는 밥을 지어 부모님께 드리자고 하는 대목은 상차림 공부이자 예절 공부가 아니겠는가.
자지로 자지로 뚜들어주소
이 나락을 곱게 찧어서
나랏님께 진상허고
자손교육도 시켜주고
조심허소 조심허소
요내 눈에 꺼시락 든다
함평 사는 천학실 할아버지의 '개장치는 소리'이다. 볏단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서 어깨 너머로 높이 들었다가 통나무나 큰 탯돌에다 힘껏 내리 때려서 벼의 낟알을 떨어낼 때 부르는 소리이다. 전통적인 벼타작 방식에 따른 민요이다. 볏단을 때리는 큰 돌을 탯돌이라 하고 통나무를 개장 또는 개상이라고 일컫기에 이 노래를 개장치는 소리라 하는 것이다. 앞소리에 따라 "잇크! 잇크!" 하면서 힘주는 소리를 뒷소리로 받는다.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 자주자주 때려 달라는 사설에서 시작하여, 타작한 벼를 곱게 찧어 쓸 일을 두루 노래한다. 나라님께 진상도 하고 쌀을 팔아 자손들 교육도 시키는 등 희망이 부풀어 있다. 그러나 꿈에 들떠 있다가 보면 실수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일꾼들에게 조심하여 볏단을 때리라고 주의도 환기시킨다. 눈에 벼의 까시라기가 들어가면 몹시 따갑고 눈도 다칠 염려가 있다.
잇날에 물맛 못보던 한수의 나락이
날 볼라꼬오 또 찾아왔네
헌 단 나가고 새 단 또 들어오니이
오데 가다가 니가 날 볼라고오
찾아왔나 에이
이 단 한 단에 나락 한 말썩만
쏟아지기를 철천지포원합니다
이 집 주인댁이 다 어데 가고
일꾼들을 붙이놓고 잠을 자는가-
밤참을 하는가아
신 술인따나 한 그륵 주소-
상주 사는 이선우 어른의 벼타작 소리이다. 마치 벼가 자기를 보고 싶어서 찾아온 듯 반기는 심정을 실감나게 풀어낸다. 물맛 못 보던 가문 나락이 물을 찾듯이 나를 또 찾아왔는가 하면서 반긴다. 벼를 다 털면 볏단이 짚단으로 바뀐다. 벼를 다 턴 짚단이 헌 단이라면 벼가 고스란히 붙어 있는 볏단은 새 단이다. 따라서 헌 단을 뒤로 던지고 새 단을 집어들면서 '어데 갔다가 니가 날 보려고 찾아왔나' 하면서 님을 본 듯이 반긴다. 일거리를 이처럼 반기면서 하노라면 고된 일도 신바람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을 아무리 신명나게 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소득이 없으면 기운이 빠져 계속하기 어렵다. 따라서 볏단마다 나락 한 말씩만 쏟아지라고 축원을 하는 것이다. 예사 축원이 아니다. 철천지포원(徹天地抱寃)이라고 절박하게 읊조린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인댁은 본체만체 한다. 일꾼들은 당장 목이 타니 시어빠진 막걸리라도 한 사발 달라는 요구가 긴박하다.
지금은 긴박한 사정이 뒤바뀌었다. 남아도는 쌀 때문에 뼈빠지게 일한 농민들만 절박하게 되었다. 쌀을 절약하기 위해 절미운동을 벌이고 도시락 혼식검사를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쌀이 남아돌아 문제라니 그야말로 탈이 났다. 탈은 쌀 생산과잉 탓이 아니라, 미국 중심의 WTO체제 탓에 값싼 외국쌀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목이 타는 농민들이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는 소리를 외치고 있는 데도 정부는 들은둥만둥 하며 신 막걸리 한 사발 내놓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강행하려 든다. 이중기 농부 시인은 이를 두고 마치 정부가 '아득바득 비상을 삼키겠다고 우기는 꼴'이라고 하였다. 쌀을 씻다가 우물가에 쌀 한 톨 떨어져도 죄받는다고 조심하던 우리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요즘 '밥맛이야!' 하는 아이들이나, 쌀을 한갓 골칫거리로 여기는 대책 없는 농정당국자들을 두고 뭐라고 하겠는가. '죄 받는다 이놈들아!'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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