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사법연수원생의 죽음

입력 2001-10-26 00:00:00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우리 전통사회에 뿌리 깊은 계급적 의미를 지닌 계층 분류를 이르는 말이다. 붓을 쥔 사람이 돈을 쥔 사람보다 더 높은 사회적 지위는 물론 명예를 누리는 게 우리의 전통이다. 자본주의가 사회의 기본 철학과 인식으로 보편화되면서 기업가.자본가의 지위가 높아지긴 했지만 붓을 든 사람이 여전히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오래된 가치관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디지털 시대에 과연 어울리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 몇년 사이 사(士)의 반열을 겨냥한 '고시 열풍'은 취업난과 겹치면서 더욱 거세지고 있다. 서울 신림동 일대의 고시촌에는 고시 준비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붐비는 고시원.독서실 등은 잘못 배분되고 왜곡된 우리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합격에 대한 중압감을 이기지 못한 고시 준비생들이 목숨을 끊는 일이 잇따르기도 했다.

최근 한 여성 2년차 사법연수원생이 수료를 앞두고 시험 직후 사망했다는 소식은 충격적이다. 성적이 상위권이었던 그는 열흘 동안 하루 걸러 계속되던 마지막 시험 기간 중 8시간 이어진 세번째 시험 답안을 작성한 뒤 화장실에서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뒤늦게 발견한 동기생들이 병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열망하던 사법시험에 합격, 마지막 관문을 뚫기 위한 사투(死鬪)에서 희생된 셈이지만 안타깝기 그지없다.

요즘은 법복(法服)을 입기 위해선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의 경쟁도 치열한 모양이다. 사시 합격자가 매년 100여명씩 늘어나면서 연수원생들 사이엔 공부에 오히려 더 목을 매야 할 정도다. 연수원 성적이 판.검사 임관과 직결되고, 임관이 되더라도 점수가 좋아야 수도권에 남을 수 있어 700여명의 동기생들은 목숨을 건 레이스를 벌일 수밖에 없다. 이번 시험 기간 중 또 다른 여성 연수원생이 쓰러졌다 깨어난 적도 있다고 한다.

고시를 준비하던 젊은이의 죽음은 우리 사회가 '고시 열풍'과 가치관의 왜곡이 안고 있는 국가적.사회적 부작용을 줄이고 인재 등용의 근본적 변화 방안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임을 알려주는 경고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사농공상의 폐습을 고치는 일은 말로만 되지는 않는다. 정부부터 고시제도의 개선 등 개혁에 나서야만 한다. 세계는 지금 새로운 시대를 맞아 급속히 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제자리걸음도 아닌 뒷걸음질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냉철하게 자성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태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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