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스-(3)까레이스키의 애환
카프카스는 아프리카 동부의 사바나(흑인종), 몽골의 건조한 초원지대(황인종)와 더불어 인류 발상지중 한 곳으로 꼽힌다. 코카서스인종이라 불리는 백인종의 고향 이다. 하지만 여러 방향에 걸친 민족의 이동으로 지금은 문화가 다른 여러 소수 민족이 섞여 있다.
그 중에는 '까레이스키'라고 불리는 한인 동포들도 포함돼 있다. 그들은 중국이나 사할린, 블라디보스토크 등 러시아 원동(遠東)지역에 살고 있는'조선족'과 구분 돼'고려인'이라 칭해진다. 대다수는 조선말기 심한 기근과 학정(虐政)에 못이겨 러시아 극동으로 옮겨가 살다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당한 사람들의 자 손으로 해외동포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유랑의 세월을 보낸 이들이다.
탐사대는 러시아로 떠나면서부터 고려인들의 현황을 알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 으나 쉽지 않았다. 심지어 주 러시아 한국대사관에서 조차 별다른 정보를 갖고 있 지 않았다. 다행히도 모스크바행 비행기에서 만난 교포 2세 김영웅씨로부터 북카 프카스지역 고려인 분포와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에 따르면 로스토프에 2만명, 크 라스노다르와 스타브로폴, 엘브루즈가 있는 카바르디노 발카리오에 각각 5천명, 북오세티야에 3천명 등 4만∼5만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씨는 "러시아 의 동포들이 연해주에 처음 진출한 것은 1863년으로 현재 5~6세손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날씨가 따뜻하고 살기 좋은 북카프카스지역에는 1950년대 말부터 중앙아 시아의 동포들이 이동하기 시작, 특히 소련이 해체되고 난 뒤 많이 몰리고 있어 고려인들의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대원들은 산맥 탐사가 끝난 뒤'핏줄찾기'에 나섰다. 김씨로부터 소개받은 서 마이 세이 니까라이비치(51)씨와 전화로 약속을 한 뒤 엘브루즈에서 버스로 2시간 거리 (130㎞)에 있는 카바르디노 발카리오 자치공화국의 수도 날칙(Nalchik)을 찾아갔 다. 서씨가 30년동안 근무해왔다는 날칙 중앙우체국에서 그를 만났다. 갑작스런 방문이었지만 그는 대원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대구 출신인 그의 집안은 러시아 원동에서 태어난 아버지 서 니꼴라이(75)씨가 강제이주때 우즈베키스탄으로 건너 가 트럭운전을 하며 가계를 일구었으며 1964년 이 곳까지 흘러들어왔다고 했다.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을 묻자 서씨는 한 신축중인 교회로 대원들을 안내 했다.
북카프카스의 고려인들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가 개방된 이후의 일로 거기에는 기독교 선교단체들의 역할이 컸다. 서울 영등포 당 일교회에서 부인과 두 딸 등 일가족과 함께 파송돼 선교활동중이던 김광선(42)목 사는 "1930년대 스탈린에 의해 일본과 내통 혐의로 소금기 많고 척박한 중앙아시 아에 강제 이주된 우리 동포들은 17만명에 달한다"며 "그들은 사실상 '집단 고려 장'을 당했다고 여기면서도 한국인 특유의 근면함으로 농사를 짓거나 공장·광산 노동자로 일하며 뿌리를 내렸다"고 소개했다. 그 후 흐루시초프 때인 1956년 거주 이전의 자유가 부분적으로 허용되자 기름지고 드넓은 카프카스로 이동하기 시작했 다는 것이다. 이 교회에서는 그들을 대상으로 한글교실도 운영하고 있었다.
탐사대는 김 목사와 서씨에게 그동안 고려인들이 살아온 얘기를 들려줄 만한 노인 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이일용(83)옹은 "부모가 지난 1903년 조선에 흉년이 들자 아무르강 인근으로 건너왔으며 강제이주 후에는 타슈 켄트에서 살다 이곳까지 옮겨왔다"고 소개한 뒤 "먼 이국땅에서 청년 학생들을 만 나게 되어 반갑다"며 대원들의 손을 꼭 쥐었다. 대학 2학년때 2차대전이 발발하자 소련군에 입대, 평양과 서울을 오가기도 했다는 그는 농사를 짓는 집안 형편이 어렵게 되자 전공인 지질학을 살려 북방지역에서 광산탐사를 해오다 1973년 은퇴, 지금까지 연금생활을 해오고 있다.
노 니꼴라이(76)씨 역시 타슈켄트에서 옮겨와 트럭운전 등으로 생계를 꾸려왔으며 맏아들은 현재 부산에서 선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예전에는 공공기관 에서 일하는 고려인도 많았으나 월급이 적고 몇 달씩 밀리는 바람에 기피하고 있 다"며 "가정에서나 친구들끼리 거의 러시아어를 사용하는데 수년 전부터 우리말을 배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함께 나온 서씨의 아버지는 "한국말을 잘 못해 미안하다"며 여러 차례 쑥스러워하기도 했다.
카프카스의 고려인들은 김치와 개고기, 장국을 즐겨 먹고 화투놀이를 즐기며, 우 리와 같은 성을 갖고 있는 영락없는 한국인이었다. 불모지에 버려졌다 또 다시 낯 설고 물설은 카프카스로 들어가 어렵게 뿌리를 내린 인동초들이었다. 대부분 집에 서 수십㎞ 떨어진 밭에서 배추와 수박, 참외, 양파 등 채소와 과일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려가고 있으며 근면하고 인정많은 사람들로 인정받고 있었다.
안타까웠던 것은 탁월한 농사꾼인 그들도 변덕스런 날씨 때문에 농사를 망치는 경 우가 많고 월 10%에 달하는 고율의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야반도주하는 사례가 흔 하다는 사실이었다. 8년 전 태권도 보급과 선교를 위해 카프카스로 들어온 박천수 (46) 사범은 "그동안 고려인들의 삶을 지켜본 결과 농업부문에 대한 한국 정부나 민간차원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것을 느꼈다"며 "거창한 행사 보다 특수작물 전문 가들이 와서 3박4일가량 세미나도 하고 농사지도와 함께 자신감을 심어주면 큰 도 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원들은 전통인형과 축구공.배지 등 2002년 월드컵 기념품을 선물한 뒤 서씨집을 방문, 아버지 서씨의 발라라이카 연주로 아리랑을 들으며 향수를 달랬다. 서씨는 "우리는 팔자대로 운명대로 러시아로 흘러왔지만 한국은 사랑하는 우리의 모국" 이라며 "앞으로 한민족이 국경 없이 살 수 있게 되고, 사랑하는 조국에 갈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대원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눴다.
글.사진=정후식기자 hschung@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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