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꼭 일주일전에 한국에 7시간여 체류하고 갔다. 역사왜곡교과서의 일본 문부성 검인정통과와 우리민족을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빠뜨린 소위 '대동아 전쟁'의 주범을 제사하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문제 그리고 남쿠릴열도에서의 꽁치조업문제 등 크게 3대 이슈가 한일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킨 상황에서 우리 땅을 찾아온 것이다. 불과 두달 전만해도 고이즈미가 특사를 보내서 비등했던 반일감정을 완화시키려했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만큼 당시 대일정서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방한사절단의 면접조차 거부한 채 문전박대를 하는 등 외교관행상 극히 이례적인 구박을 감행할만큼 대일본 감정이 예리했던 것이 지난 7월이었다. 전국이 온통 항일의식으로 충일했고, 우국열혈(?) 청년 10여명이 엽기적인 단지(斷脂)까지 감행한 기억이 아직도 선연한데 어째서 사건의 장본인을 홀연히 불러들였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게 국민 대다수의 정서이다.
180도 전환한 정부 태도에 대해, 전향적이고 진일보한 일본의 자세변화가 있을 것이란 기대부푼 풍선을 정부가 띄웠고, 결자해지의 모습이 전제됐을 것이란 인식을 국민들은 가졌었다. 그래서 우리는 굴욕외교란 우려의 목소리도 숨죽이고 고이즈미의 '서울입성'을 예의주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인가. 지난봄 신 우익화의 바람을 몰고 등극한 새 일본총리의 우경화 정치노선을 보강시켜준 꼴이 아닌가. 아시아 무시정책을 불식시킨 근린외교정책에 무게를 실어주었고, 일본자위대가 미국의 반테러전쟁을 등에 업고 해외파병의 길을 가는데 면죄부를 허락한 결과를 안겨준 것밖에 아무 것도 얻은게 없다.
교과서 왜곡의 역사인식문제는 무슨 역사공동연구기구를 조직한다고 했지만 노회하고 교활한 일본인들이 과연 얼마나 진솔한 자기반성적 역사를 시인할 것인지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전범원흉을 제사하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문제는 누구라도 허용시킨다는 김빠진 원칙론을 제시했을 뿐이다.
또 가장 핵심적 관심사로 부각된 꽁치조업문제는 실무선에서 해결한다는 '구렁이 담넘기'식으로 어물쩍 넘겨버렸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당장 우리 꽁치어획량의 3분의1 정도인 1만5천t가량을 남쿠릴근해에서 어획하는 실정인데 내년부터 조업을 금지당할때 우리어민이 당할 막심한 손해를 감안한다면 이것은 생존의 문제이다. 이런 중차대한 3대문제에 대한 뾰족한 해결없이 결과적으로 빈 보따리만 갖고와서 한국의 면죄부만 챙겨갔다는 비난 앞에 정부는 무엇이라 대답하든 궁색할 수밖에 없다.
차제에 생각할 것은 국제정치는 현실주의란 패러다임에 입각하여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작년 12월에 한국과 러시아가 체결한 어업협정에 따라 연85만달러의 입어료를 내고 한국은 쿠릴열도에서 꽁치조업을 허락받았다. 반면 일본은 남쿠릴열도에서 제3국 조업을 차단하는 대가로 5억달러의 수산자원 보존협력금을 러시아에 제공하기로 한 것을 비교할 때 한국은 그야말로 게임이 안된다.
실리외교의 냉엄한 현실앞에 한국의 남쿠릴조업권은 제물이 된 것이다. 실리앞에 명분을 초개처럼 파기하는 러시아의 신의없음을 탓하거나 경제력을 앞세워 교활한 비밀외교를 연출하는 일본을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 외교통상부나 해양수산부의 외교력 부재와 무능 및 무사안일한 태도를 먼저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무엇보다 경악스런 것은 고이즈미 총리가 일제의 고문 현장인 서대문 독립공원을 둘러본 후 한일양국이 "서로 반성하자"라고 했다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것이야말로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다. 뒤에 실수라고 했지만 참으로 계산된 그들의 '본심(혼네)'임을 유추할만하다.
공자는 '중용이란 일희일비 않는 것'이라고 했다.(喜怒哀樂之未發謂中) 우리 외교의 일관성과 신뢰도를 다시한번 생각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두달전 전국을 반일열풍으로 몰입시켜 연일연야 항일데모를 연출시킨 자와 고이즈미 총리를 칙사대접한 두 얼굴의 야누스를 민초들이 용납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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