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오후

입력 2001-10-18 00:00:00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전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어린 딸을 때리면서 가을밤 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10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백석 '여승(女僧)'

남편은 돈 벌겠다고 벌처럼 집을 나가 광부가 되고, 여인은 어린 딸을 업고 금전판(금광)을 떠돌며 옥수수 행상을 한다. 10년이 지나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가을밤 같이 차게울던 어린 딸은 죽어 돌무덤으로 갔다. 그리고 어머니는 여승이 되었다.

한 여자의 기구한 운명이 축약되어 있는 이 시는 1930년대 식민지 시절 우리 모습의 전형이다. 현재의 우리는 여기서 얼마나 멀리 나아갔는가? 시는 아무래도 기쁨보다는 산꿩의 울음과 같은 슬픔에게 더 친연성이 있는가보다.

김용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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