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불붙은 치악산…화려한 '색깔잔치'단풍에 물들어서일까. 울긋불긋 단풍잎 사이, 그 단풍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단풍이 물들어 있다. 곱게 분단장한 새색시의 얼굴이 이처럼 고울까. 세상근심 모르는 아이들의 얼굴이 이처럼 예쁠까. 발길이 자꾸 멈춰진다. 탄성이 터진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색깔도 가지각색. 빨강·노랑·주황·갈색, 거기다 연초록까지. 화려한 색의 잔치가 벌어진다. 저마다 최고인양 자태를 뿜어낸다. 그러나 낙엽으로 길바닥에 떨어져 밟힐 때마다 바스락 소리를 낼 때는 가을도 그리 오래 남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설악산에서 불붙기 시작한 단풍이 남으로 내달리고 있다. 이번주 절정을 이루면서 하순이면 대구 인근까지 다다를 것이라 한다.
강원도 원주 치악산. 중앙고속도로 덕분에 편해진 길. 풍기~제천 구간만 완공되면 언제든 논스톱으로 달릴 수 있게 된다. 원주가 예전보다 휠씬 가까워 진 셈이다.국립공원 치악산은 옛날 동악단(東岳壇)을 쌓고 인근 5개 고을 수령들이 제(祭)를 지냈던 명산. 유달리 지형이 험하고 골짜기가 많아 그 역사만큼이나 골골마다 전설을 간직한 사적지와 절집이 등산객들을 빙그레 웃음 짓게 한다.
치악산은 골짜기가 많은 만큼 등산 기점도 여러갈래. 기점을 어디로 잡든 주봉인 비로봉(1,288m)이나 향로봉(1,043m)은 거치게 마련. 단풍객들이 북적이는 구룡사, 사다리 병창, 비로봉 길 대신 국형사, 보문사, 향로봉, 남대봉, 상원사로 여정을 잡는다.
행구동사무소, 원주공고를 지나 치악민속박물관에서 산행이 시작됐다. 산행초입의 반듯한 국형사. 조선 두번째 임금인 정종의 딸 희희공주가 폐병에 걸리자 이곳 보문암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면서 완쾌되어 환궁한 후 임금이 동악단을 쌓게 했다는 이야기가 긴 여운을 남긴다. 국형사를 지나자 오르막 길. 길동무 해주던 계곡 물소리도 더는 못 가겠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힌다.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걷던 부부도 조용해지고, 남편을 따라 오르느라 숨이 가쁜 부인의 얼굴이 불그레 홍조를 띤다. 부인의 얼굴만이 아니다. 산길 양쪽도 붉어지기 시작한다. 멀리 올려다 보이는 향로봉은 붉은 물감을 점점이 뿌려 놓은 듯 모습을 드러낸다.
보문사에서 약숫물 한모금. 따사로운 햇살 아래 나이 지긋한 스님이 책을 읽고 있다. 지나가는 등산객뿐만 아니라 머리맡의 단풍에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향로봉 오르는 길은 단풍나무들의 경연장이다. 등산객들은 턱에 차오르는 숨을 죽이고 색깔에 맘껏 취한다. 땀방울 훔치기도 잊은 채 너나없이 화가라도 된 것처럼 마음의 도화지를 펼치고 색깔을 칠해간다. 올 가을 내내 잊어버리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약 1시간 30분만에 도착한 향로봉. 원주 시내가 지척이다. 1천m고지가 넘는 산 정상, 가을바람이 단풍의 취기를 잠깐 깨워준다. 이제부터는 완만한 능선길(치악 평원). 억새도 이름모를 꽃들도 단풍잔치에 부조한다. 길이 편해지니 손길이 자꾸 단풍잎으로 다가 간다. 1시간 30분여를 더 가니 남대봉. 그런데 이게 웬일. 정상 표지석이 눈에 띄지 않는다. 지도에 표시는 되어 있지만 실제 위치는 산꾼들 사이에 또다른 희명봉과 논란이 있어 그런 모양이다.
남대봉 바로 아래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높은 곳에 위치한 절, 상원사다. 신라 경순왕때 개창한 이래 참선도량으로 일관하고 있는 수도처이기도 하다. 구렁이에게 잡혀먹힐 뻔 한 목숨을 구해준 선비에게 은혜 갚음 하는라 상원사 종을 머리로 쳐서 울린 꿩 세마리의 피를 기억해서 일까. 산신각 뒤편으로 이 깊은 골 어느 곳 보다 단풍이 붉게 빛난다. 아니 불타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다리쉼을 하고 있던 등산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아진다. 같은 단풍이라도 사연이 있으면 달라 보이는 것일까. 저마다 생각에 잠긴다. 상원사종 앞에서 사진찍기도 깜빡 한다언젠가는 나무와 잎이 이별잔치를 벌이는 게 또한 단풍이 아닌가. 상원사에서 매표소까지 3시간 30분 거리를 따사로운 가을햇살에 취한 채, 단풍에 물들어가며 내려왔다.
노진규기자 jgroh@imaeil.com
▨가는 길:중앙고속도를 이용(풍기~제천 구간 제외), 원주까지 3시간 30분쯤 걸린다. 원주시내에서 국형사까지는 10분, 구룡사까지 30분이 걸린다.
▨가볼만한 곳:△간현관광지=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절경을 예찬한 섬강의 푸른 강물을 끼고 있다. 기암과 준봉이 병풍처럼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운치가 그만이다.
△태기산(1,261m)=횡성군의 최고봉. 산 정상에는 삼한시대 진한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이 신라 박혁거세에 대항했다는 태기산성(약 1㎞)과 태기산성비가 있다. 주변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봉복사라는 절과 약수터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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