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실업자들의 긴 한숨

입력 2001-09-26 12:11:00

1999년 외국어대를 졸업한 권모(31.대구 황금동)씨의 요즘 가정 생활은 말이 아니다. 작년에 결혼해 돌을 갓 지난 딸을 뒀으나 8개월째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 10평짜리 사글세 아파트에 지난 여름 무더위에도 선풍기조차 마음대로 돌리지 못했다.

자신의 힘으로는 딸 분유 값도 벌지 못하는 처지가 되자 이제 집에 들어 가 부인 얼굴 대하는 게 무서워졌다. "큰일입니다. 정말 큰일 났어요. 내가 왜 이렇게 된 건지 숨이 막힐 뿐 입니다. 대학 때 공부를 열심히 했더라면 하는 후회도 해 보지만 소용 없잖아요.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겠어요". 듣는 이까지 숨막힐 이야기 뿐이다.

권씨는 결혼 후 올해 초까지 대구지역 건강식품 업체 영업사원으로 일하며 한달에 80여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마저 실적이 낮다고 6개월만에 밀려나야 했다. 그 뒤 얼마 동안은 신용카드로 현금을 빼 월급이라며 만들어 갖다 주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나마 한도에 차 하릴없는 형편.

"신문에 구직광고만 보이면 눈이 번쩍 뜨여요, 단숨에 달려가 일자리를 애원해 보지만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을 구한다는 반응뿐입니다". 대졸 실업자 구직난을 노려 곳곳에 거미줄 친 피라밋 판매조직과 비정상적 영업 조직이 권씨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고 했다.

부인은 결혼 전 권씨의 대학 등록금을 거의 대다시피 했다. 간호사로 근무하며 권씨가 졸업만 하면 고생 끝이리라 믿었던 것. 그러나 남편의 실직 기간이 자꾸만 길어지면서 이제는 절망스러워 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지난 실직 8개월간 권씨는 공무원 시험에 매달려 보기도 했다. 그러나 지방9급 공무원 시험 역시 하늘의 별 따기. 시험에 잇따라 낙방하면서 더 한층 의욕을 잃게 된 권씨는 아침마다 집을 나서지만 온종일 머물 곳이라고는 PC방 뿐. 처음엔 구직 사이트를 찾으러 들렀으나 차츰 게임에 빠져 이제는 중독 증세마저 느끼고 있다. 답답한 현실을 잊고 지내는 데는 사이버 공간이 안성맞춤인 것. 결국 권씨는 부인 바가지를 핑게로 가출까지 해버렸다.

작년에 안동대를 졸업한 이모(29.용상동)씨. 대학만 졸업하면 뭐든 못하겠느냐는 마음에 생활정보지 광고사원에서부터 식당 종업원까지 아내와 가정을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하지만 희망하는 직장에 들어가는 꿈이 갈수록 멀어지고 있음을 느끼면서 실의에 차 있다.

그가 요즘 하는 일은 안동지역 고교에서 교내 청소 등 잡다한 일을 책임지는 것. 한달 월급이 90여만원이다. 한살박이 아들 하나를 포함한 세 식구의 빠듯한 살림살이에 지친 듯, 동창회.친목회에 나가보지 않은 지도 오래됐다. 쾌활하고 외형적이던 성격도 차츰 내성적으로 바뀌어 가는듯 하다고 했다. 대학 성적은 A+였지만 사회.가정에서의 평가는 그렇지 못하다. 한창 꿈에 부풀어 힘차게 일할 나이지만 고개 숙인 20대로 전락해 시작도 못해본 채 시들어 간다는 느낌에 몸서리친다.

가출신고를 하면서 경찰관에게 남편을 찾아 달라고 호소하는 20대 후반의 앳된 아내, 사이버 노숙자로 전락해 방황하는 30대 초반의 남편… 정부는 IMF를 졸업했다고 자축연을 가졌지만 대졸 실업자들의 현주소는 답답하기만 하다.

안동.권동순기자 pinoky@imaeil.com

운전직.사무보조직 등 공직에까지 대졸 취업 희망자가 몰리고 있다. 울산시청이 공무원을 35명 신규 채용키로 하고 지난 21일 원서 접수를 마감한 결과, 무려 539명이 지원해 평균 경쟁률이 15.4대 1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 1명씩 뽑는 기능직 10급 사무보조원에 75명, 전기직(9급)에 40명, 농업연구직(원예) 25명, 수산직(9급)에 23명이 원서를 냈고, 각 3명을 모집하는 운전직(기능 10급)엔 66명, 건축직(9급)엔 62명이 지원했다.

그러나 전체 응모자 중 중졸(1명) 고졸(58명)은 전체의 10.9%에 불과했고, 전문대졸이 140명, 대졸이 245명, 대학원 졸이 20명이나 됐다. 대졸은 운전직에도 7명, 사무보조직에도 28명이나 몰렸다.

울산.최봉국기자 choibo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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