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데스크-악마적 테러

입력 2001-09-19 14:30:00

어느날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시간, 테러범들에 의해 하이재킹된 대한항공 여객기가 서울 여의도 63빌딩에 충돌하고 18분후엔 아시아나항공 여객기가 인근 특급호텔에 충돌했다고 가정해보자.

거의 같은 시간, 납치된 또 다른 국적기는 과천 정부종합청사 측면을 부수며 추락하고 대구공항을 이륙한 여객기는 추풍령 부근 야산에 추락했다고 가정해보자.

영화적 상상조차 미치지 못했고 공상으로도 "설마…"할 전대미문의 대참사.

국민들은 엄청난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고 CNN방송으로 생생한 현장 상황을 목도한 세계인들은 경악했다.

이 무렵 거대한 63빌딩이 원폭 구름같은 먼지를 뿜으며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뒤이어 호텔건물도 시야에서 사랴져 버렸다. 충격파를 견디지 못한 인근 빌딩도 무너졌다.

비행기에 탔던 수백명의 무고한 승객들. 무너지기전 빌딩의 창틀에 의지해 구조를 목메어 외치다 꽃잎처럼 떨어지거나 뛰어내린 사람들. 계단을 통해 내려오다, 빌딩밖까지 가까스로 나왔다가 건물붕괴로 매몰된 사람들. 길가던 사람들. 정부청사에서 안보를 위해 일하던 사람들. 희생자 1만여명.

63빌딩과 호텔 등지에는 이날 보수정치인들의 회합과 개혁파 정치인들의 연대회의가 있었고, 공과 공방을 벌인 시민단체 토론회와 민주투사 회고모임도 있었고, 10대들의 우상인 인기가수의 결혼식도 있었다. 건물 경비로 일하는 월남참전 용사도 있고, 주방에서 양파를 다듬는 아줌마도 있고, 이날 첫 출근한 젊은이도 있고, 자식 덕에 관광하러온 시골 노인도 있고, 생일을 맞아 아빠 엄마와 함께 나들이 나온 꼬마도 있다.

한국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와 비상국무회의를 열어 계엄령을 선포했다. 주한미군도 최고의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정부는 전쟁과 다름없는 미증유의 만행에 대해 국제사회와 함께 규탄하고 테러범을 끝까지 밝혀내 응분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성명했다. 덧붙여 우리 군은 철통같은 방위태세를 유지하고 있으니 국민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미국을 비롯한 우방은 물론 한국과 소원했던 나라들까지 테러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미국은 지구촌 경찰답게 선도적이고 단호한 태도로 나왔다. 테러참사를 새로운 전쟁으로 규정하고 핵항모 엔터프라이즈호를 동해로 보냈다. 오키나와 최신예 전폭기를 오산비행장으로 이동시키고 조기경보기를 가동했다.

미국 국민들은 한국민들의 충격과 슬픔에 진심어린 위로를 보내고 미국정부에 테러와의 전쟁에 과감히 나설 것을 주문했다. 암살, 테러 같은 비열한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격렬한 분노를 표시했다.

일본은 한국민 이상의 전율을 감추지 못하고 미국과의 긴밀한 강조로 이 테러사건의 배후를 완전히 박멸하자는 쪽으로 나섰다.

그러나 정작 잔악무도한 테러참극의 주모자가 누구인지 좀처럼 밝혀지지 않았다. 심증이 가는 곳이 분명히 있으나 물증이 없었다.

북한도 사건 발생 직후 평양방송을 통해 애도의 뜻을 표했다.

미국 주도의 테러와의 전쟁 준비는 추정되는 테러범의 근거지가 공격하기 용이하지 않고 전쟁이 장기화 될 것이 예상되면서 안팎의 논란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일부 국가는 명확한 증거도 없이 공격을 감행해서는 안된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이다 라는 신중론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미국 국민과 언론에서도 표독스럽지 않은 신중론이 흘러나왔다.

사건직후 거의 패닉상태에 빠졌던 한국의 사정은 어떨까.

국민의 애국심이 발양되어 애국가를 합창하며 헌혈과 자원입대에 나서는 사람들의 행렬이 끝간데 없이 이어졌을가.

아마도 국민들은 미국의 신속한 군사적 대응조치 덕분에 한숨 돌리고 그런 연후에 나름대로 상황판단을 하지 않았을가.

그 안도의 틈새를 이용해 있는 자들은 국외 탈출만이 살길이라고 튀기 시작할까. 덩달아 별로 있지도 않은 사람들도 자구책마련한답시고 금을 모으기 시작할까.

6·25, 월남전 참전용사등 노병들의 자유민주주의 사수 테러규탄집회가 열릴 법도 하다.

그러면 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나서도 괜찮을만해지니까 나설지도 모른다. 한국이 테러를 당한 배경을 반성해야 한다. 오죽하면 그런 테러를 했겠느냐, 테러범 잡는다고 무고한 사람잡지말라, 등등의 주장을 펴게 될지 모른다. 나아가 미국은 한국을 전쟁으로 몰고가지 말라, 제국주의 강화를 위한 미국의 자작극이 아니냐고 주장하다 급기야 미국 물러가라고 외칠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천인공노할 테러에 숨져간 만여명의 무구한 희생자들은 산 자들의 위선적 노닥거림에 파묻혀 아무런 위로도 받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인류는 가장 악마적인 테러를 또 하나의 폭력 문화로 용인하는 오점을 남기게 될지도 모른다.

폭력은 폭력을 부르기도 하지만 악질적 범죄엔 그보다 더 가혹한 보복과 응징이 효과적이라는 것도 인류사적 교훈이다.

김재열 편집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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