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홀 서빙 이태남·박세웅씨

입력 2001-09-10 00:00:00

레스토랑 '풀 하우스'(대구 중구 덕산동 화방거리)의 가냘픈 남자 '제비' 박세웅(33)씨와 튼튼한 '누나' 이태남(52)씨. '제비'는 이 레스토랑에서 14년을 웨이터로 일했고 '누나'(나이지긋한 손님들은 미스 리라 부른다)는 이 레스토랑의 전신 '늘봄'시절부터 18년을 웨이트리스로 함께 일해왔다.

오랜 세월 같은 주인 밑에서 한 솥밥을 먹으며 얼굴을 맞대고 사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두 사람도 자주 싸운다. '제비'와 '누나'를 떼어놓고 험담을 부탁했더니 별 막힘(?)이 없다. 마음만 먹는다면 100가지쯤 상대의 흠을 끄집어내는 일은 식은 죽 먹기라는 표정이다.

티격태격 싸워가며 두 사람은 얼굴을 맞대고 식사를 하고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손님을 맞고 보낸다. 10대 청소년부터 90대 손님까지 고른 연령층의 손님들이 이 레스토랑을 찾는 것은 어쩌면 두 사람의 오랜 장맛같은 푸근함 때문인지도 모른다'누나' 이태남씨는 외국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머리 희끗희끗한 웨이트리스이다. 서리내린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가볍게 화장까지 했지만 그 얼굴에 나이를 속일만한 구석은 없다. 그러나 '누나'의 그 나이는 젊은 웨이트리스의 미소보다 더 큰 매력이다. 나이든 손님도, 갓 스물을 넘긴 손님도 '누나'의 얼굴에서 묻어나는 온기에 덩달아 푸근해진다. '아가씨 여기 물 요!'하고 소리쳤던, 풀 하우스를 처음 찾은 젊은 손님은 '누나'의 등장에 잠시 당혹스러워 하다 이내 야릇한 행복감에 사로잡히고 만다.

'누나'의 푸근한 미소를 바라볼 요량으로 일부러 풀 하우스를 찾는 중년의 손님도 많다. 혼자 레스토랑을 찾은 중년의 신사는 어쩌다 '누나'가 자리를 비운 때라면 그냥 발길을 돌리기도 한다. 오랜 말벗 '미스 리'가 없는 날은 왠지 레스토랑 안이 허전해 보이기 때문이다.

20년 가까운 웨이트리스 생활에 할 말이 왜 없을까마는 '누나'는 할말이 없다며 연방 손사래를 친다. 아마도 '누나'는 어떤 사연을 털어놓으며 눈시울을 붉힐 나이는 지났나보다.

'제비' 박세웅씨는 김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이곳에 왔다. 한 달 혹은 두 달쯤, 길면 1,2년쯤 이어가리라는 웨이터 생활. 그러나 '제비'에게 풀 하우스는 고향이 돼 버렸다. 자신의 말대로 '제비'는 풀 하우스에서 자랐고 이제 늙어가고(?) 있다. 줄곧 48㎏을 유지하던 몸무게가 재작년부터 늘기 시작해 지금은 56㎏에 닿았다. 늙어간다는 '제비'의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제비'는 아직 총각이다. 최소한 두 아기의 아빠고 40대일 것이란 추측은 어처구니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중후한 맛을 풍기기 위해 나이든 것처럼 꾸몄노라는 그의 말은 아무래도 애교스런 변명처럼 들린다.

'제비'는 세상을 잘 모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레스토랑에서 살았다. 텔레비전도, 영화도, 연애도, 오락도 모른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그가 보아온 것은 손님들로 가득한 레스토랑이었을 뿐이다. 커피잔과 맥주병, 갓 구어 낸 피자를 나르다 어느날 문득 거울 앞에 섰을 때 서른 중반의 남자가 돼있음을 알았다.

'제비'는 절대로 허둥대지 않으면서 날렵하다. 작은 몸집, 제비처럼 갸름한 얼굴과 달리 그의 음성에는 억양이 별로 없다. 흰 이를 드러내며 조용히 웃거나 낮은 목소리로 대답할 뿐이다.

"일한 지 보름만에 얻은 별명이 제비예요. 몸이 날쌔다고 누가 그렇게 불렀는데 그게 이름처럼 돼 버렸어요".

'제비'는 홀 서빙은 신나는 일이라고 말한다. 퇴근해서 축 늘어져 있다가도 출근하면 힘이 솟는다. 그런 '제비'는 지금껏 명절을 한번도 고향집에서 지낸 일이 없다. 명절 전날 잠시 들렀다 명절날엔 출근했다. 풀 하우스는 365일 내내 손님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홀 서빙은 나의 천직입니다". 무엇이든 티격태격할 줄 알았던 이태남씨와 박세웅씨가 서로 약속한 것처럼 뱉는 말이다. '누나' 이태남씨는 "60세가 될 때까지 웨이트리스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이제 막 생각났다는 듯, 그러나 오래 묻어둔 것 같은 소망을 털어놓는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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